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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詩]정일근의 '어머니의 배추'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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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에게 겨울 배추는 시(詩)다/어린 모종에서 시작해/한 포기 배추가 완성될 때까지/손 쉬지 않는 저 끝없는 퇴고/(……)/시집 속에 납작해져 죽어버린 내 시가 아니라/살아서 배추벌레와 함께 사는/살아서 숨을 쉬는 시/어머니의 시

정일근의 '어머니의 배추' 중에서

■ 가끔 잘 익은 생배추를 된장에 찍어먹을 때면, 생각한다. 배추 속에 들어있는 아주 작은 고갱이는 겹겹으로 둘러싸인 배추잎들 속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잼잼하는 어린 손같은 노란 잎을 지키기 위해 겉쪽의 푸른 잎들은 밤이슬을 견디고 찬바람에 몸이 터졌다. 몸 속으로 갈수록 어려지는 잎들은 저마다 밖의 잎들을 옷 삼아 체온을 유지하며 다시 자신보다 더 어린 잎을 향해 온몸을 오그린다. 한 뿌리 위에서 바깥에는 수많은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가 있고, 안으로 갈수록 아기의 아기의 아기가 안겨있는 이 희한한 겹겹 모성애의 내면을 지닌 배추 한 덩이. 고갱이 배추의 고소하고 달달한 맛을 보며 생각한다. 이 작은 잎은 메아리같은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로부터 별은 어떻게 반짝이는지, 꽃들은 어떤 향기를 뿌리는지, 어린 새들은 어떻게 뒤뚱거리는 걸음을 옮기는지 전해들었을까. 그 배추들의 장엄한 가계도 앞에서, 시인은 배추가 어머니의 시라고 말한다. 이미 쟁쟁한 배추 대가족을 여러 고랑이나 땀흘려가며 키워낸, 배추의 여신같은 어머니. 여치와 사마귀와 민달팽이가 굳이 읽지 않아도, 배추 대가족이 일제히 눈을 우러르며 벌써 어머니라는 시 한편을 읽고 있는지 모른다.





빈섬 이상국 편집부장ㆍ시인 isom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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