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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빈섬의 스토리]아! 기황후, 누가 그 무덤에 침을 뱉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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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황후가 된 고려여인 기순녀③끝

원나라 권력 믿고 오빠 기철의 오만과 횡포 극에 달해
공민왕이 그를 숙청하자 분노한 순녀는 고려를 치는데…
조국에 칼 들이댄 그녀를, 역사는 파묻었지만 연천의 그 무덤은 할 말이 많다


[이빈섬의 스토리]아! 기황후, 누가 그 무덤에 침을 뱉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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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후가 된 순녀, 원나라에 일으킨 고려풍

기순녀를 이제부터 기황후라고 부르겠다. 그는 흥성궁(興聖宮)에 거주했다. 그곳에는 황후 부속기관인 휘정원이 있었는데, 그는 자정원(資政院)이라고 이름을 바꿔 세력기반으로 삼는다. 정치의 바탕을 만들겠다는 그의 야심이 그 이름 '資政'에서 보이는 듯하다. 고용보가 제1대 자정원사로 임명된다. 자정원은 차츰 기황후를 추종하는 '팬'들(여기에는 고려 출신 환관뿐 아니라 몽골 출신 고위관료도 있었다)의 조직으로 발전해 '자정원당'이라는 정치세력을 형성한다.

기황후는 자신의 정치적 앞길을 막는 세력은 가차없이 처단했지만, 협조하는 사람들에게는 너그러웠다. 빠앤의 조카였던 토크타가(脫脫)를 유배지에서 불러들여 중서성 우승상에 임명한 것은 그런 '자비정치'를 통한 우군 만들기였다. 1353년 기황후의 아들 아유시리다라는 14세의 나이로 황태자에 책봉된다. 또 고려 출신 환관 박불화에게 군사 통솔 최고책임자인 추밀원 동지추밀원사를 맡긴다. 인연에 대한 보답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자신이 믿고 맡길 만한 군사적 배후가 필요했던 점도 있었을 것이다.
고려 여인이 최고 권력이 되자 원나라는 풍속이 바뀌기 시작한다. 고려에서는 몽골 변발과 족두리, 남녀 옷고름에 차는 장도, 신부 연지가 유행하던 때에 오히려 몽골 수도 한복판에서는 고려 패션이 유행한다. 그것을 고려양(高麗樣)이라고 불렀다. 기황후는 고려 공녀들 중에서 미인들을 뽑아 원나라의 고관들에게 보냈다. 그래서 고려 여인을 얻지 못한 사내는 권력도 아니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궁중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절반 이상이 고려 여인이었다고 한다.

원나라의 상황이 이렇게 되자 고려에 있는 기황후의 친정 또한 위상이 전혀 달라졌다. 이미 사망한 부친 기자오는 영안왕에 봉해지고 장헌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어머니 이씨에게는 대부인이라는 작위가 내려왔고, 집 문에는 '정절(貞節)'이라는 정표가 세워진다. 기황후의 오빠인 기철은 원나라로부터 정동행성 참지정사에 임명되고 고려로부터도 덕성부원군에 봉해졌다. 또 다른 오빠인 기원은 원나라 한림학사 벼슬을 받는다.

원나라의 순제는 1351년 재위 3년 된 충정왕을 폐위하고 공민왕을 즉위시킬 만큼 고려 왕실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런 시절이니 기철의 오만함은 극에 달했다. 1353년 기황후의 어머니 대부인 이씨를 위한 연회가 열렸다. 공민왕이 기황후의 아들인 황태자 아유시리다라를 향해 무릎을 꿇고 잔을 올리는 것을 보고 기철은 기고만장해졌다. 왕과 나란히 걷기도 하고 자신을 신하로 부르지도 않았다. 동생 기주ㆍ기륜, 조카 기삼만 등 친족은 일반 백성의 아내와 땅을 빼앗아 원성을 샀다.

# 오빠를 죽인 공민왕에 분노하는 기황후

1356년 5월 중순 공민왕은 기철 일당이 역모를 꾀한 혐의를 잡고 전격적으로 숙청해버린다. 그들의 목이 궐 밖에 던져질 때 아무도 슬퍼하지 않았다고 한다. 공민왕은 기철을 죽인 뒤 고려에 설치한 원나라 기관(정동행성이문소)를 없애고 원나라 연호를 사용하지 않았으며, 원에 빼앗긴 옛 땅을 찾는 일을 추진했다.

고려에서 이런 상황이 벌어지자 기황후는 복수를 결심한다. 그동안 원나라에서 고려인의 공녀 관행을 폐지하고 고려를 원의 성(省)으로 만들려는 계획을 무산시키는 등 고려를 위해 나름으로 애쓴 바 있었으나, 집안이 멸족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피가 거꾸로 솟구쳤다. 그는 황태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대는 이만큼 장성했는데 어찌 어미의 원수를 갚아주지 않습니까?"

1364년(공민왕 13년) 원 황제는 공민왕을 폐한다고 발표하고 충선왕의 셋째아들 덕흥군을 왕으로 책봉했다. 그리고 최유에게 1만명의 군사를 주어 압록강을 건너게 했다. 원병(元兵)은 최영과 이성계의 군사에게 대패하고 돌아갔다. 서서히 약체가 되어버린 원나라는 고려를 현실적으로 제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기황후는 정파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화합을 역설했고, 백성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선정을 행하였다. 1358년 대도(大都)에는 큰 기근이 들었는데, 기황후는 관청에 명령을 내려 죽을 쑤고, 자정원에서는 금은ㆍ포백ㆍ곡식을 아낌없이 내놓았다. 그리고 10만명이 넘는 아사자를 위해 장례를 치르고 영혼을 위로하는 큰 모임도 열었다.

기황후의 이 같은 활약 이면에는 원 왕조 말년의 무기력이 엿보인다. 그 많은 인원이 굶어 죽도록 방치한 것은 결국 권력 자신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주원장(명나라 태조)을 비롯한 한족의 봉기도 점점 잦아지고 있었다.

기황후는 무능한 황제를 바꿔야 천하를 안정시킬 수 있다는 판단을 하게 된다.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그의 감각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자정원사가 되어있던 박불화는 황후의 지시를 받고 황제에게 양위를 건의한다. 순제는 깜짝 놀라며 그럴 수 없다고 저항한다. 황제는 황후의 아들인 황태자 아유시리다라에게 중서령 추밀사 직책과 군사권을 주겠다고 타협안을 내놓았다.

# 경기도 연천에 있는 기황후의 묘

하지만 그에게 기황후 세력을 통제할 힘은 이미 없었다. 어사대부 불가노가 박불화를 탄핵했다 도리어 귀양가는 일이 생기기도 한다. 1365년 제1황후가 세상을 뜬 뒤 기황후는 25년 만에 원나라 제1황후가 되었다. 그러나 그가 소원을 이뤘을 무렵, 나라는 이미 걷잡을 수 없이 기울어져 있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정파들의 내분은 그치지 않았다. 1년 뒤 원 제국은 주원장에게 쫓겨 대도를 버리고 북쪽의 몽골초원으로 옮겨가야 했다.
경기도 연천읍에는 '기황후의 묘'라고 불리는 오래된 묘가 있다. 공민왕 이후 원나라와 고려의 관계를 생각할 때 기황후가 이곳에 묻혔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해 보인다. 그러나 기황후가 고려를 못 잊어 유골이라도 귀향하고 싶다는 유언을 남겼고, 그래서 일부 유골이 이곳에 묻혔을 수 있다는 '스토리'는 애틋한 여운을 준다.

열다섯 살에 사지(死地)로 내몰리듯 국경을 넘어갔던 공녀의 길. 문득 대국에서 영화를 누리고 다시 주검이 되어 고국으로 돌아와 묻히는 일. 여기에는 삶의 무상과 기구한 순환을 살펴보게 한다. 고려가 버린 여인이 고려를 위협하는 대국의 정상이 되었던 것도 아이로니컬하지만, 그녀의 형제들이 졸지에 생겨난 권세를 믿고 저지른 행악(行惡) 때문에 역경을 헤쳐나간 기황후의 빛나는 투지와 고려에 대한 애국적 선의(善意)조차 도굴 당한 무덤처럼 휑하니 도굴 당한 것도 우습다.

원나라는 그 수많은 고려인을 거대한 육식동물처럼 삼켰지만, 결국 그들의 몸 속으로 파고든 고려인이 뇌를 지배하고 손발을 지배하여 숙주의 큰 덩치를 넘어뜨렸는지 모른다. 그 바닥과 정점을 잇는 가장 빠르고 높은 지점에 기황후가 있었다.<끝>

빈섬 이상국 편집부장 isomis@asiae.co.kr

1편 바로가기 : ①죽기보다 못하다면 자결하리다
2편 바로가기 : ②노리개 여인이 최고 권력으로…기황후의 인생 大역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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