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Dim영역

[아,저詩]정현종의 '흰 종이의 숨결'

스크랩 글자크기

글자크기 설정

닫기
인쇄 RSS
흔히 한 장의 백지가/그 위에 쓰여지는 말보다/더 깊고/그 가장자리는/허공에 닿아 있으므로 가없는/무슨 소리를 울려 보내고 있는 때가 많다./거기 쓰는 말이/그 흰 종이의 숨결을 손상하지 않는다면, 상품이고/허공의 숨결로 숨을 쉰다면, 명품이다

■ 복사꽃이 가득 피어 있는 마을 한복판에서 피부가 보얀 노인 둘이 바둑을 둔다. 한편에선 다른 노인이 책을 읽고 있다. 바둑 두는 노인에게 다가가 보았더니, 바둑판 위엔 아무 줄도 그어져 있지 않고 바둑돌도 없다. 빈손으로, 없는 돌을 옮기며 묵묵히 두고 있다. 독서삼매에 빠진 노인에게로 가보았다. 그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책을 천천히 넘기며 깊은 생각에 빠져 있다. 이상한 짓을, 멍하니 함께 들여다보다가 꿈을 깬다. 깨어나 문득 정현종의 해몽을 듣는다. "백지는 그 위에 쓰인 말보다 더 심오한 거야. 흰 가장자리는 허공에 닿아 있어. 백지의 소리를 들어보라. 가없는 무슨 소리를 울려보내고 있지 않은가." 노인들은 빈 바둑을 통해 미묘하고 무한한 생각들을 서로 나누고, 빈 책을 읽으며 깊이 있는 사유를 해나가고 있었을까. 시인은, 그것보다는 쉬운, 현실적인 종이 사용법을 알려준다. 거기 쓰는 글이 여백의 숨결을 해치지 않는다면 상품(上品)일세. 빈 종이의 울림만큼 울릴 수 있는 글을 쓰게. 글이 만약에 흰 종이의 숨소리까지 낼 수 있다면 명품이라 할 만하네. 시(詩)여, 빈 종이의 허적(虛寂)만큼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있는가. 백지를 모독하는 글 나부랭이를 쓰는 자들을 무지 무안하게 하는 백지철학이다.





빈섬 이상국 편집부장ㆍ시인 isomis@
AD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이슈 PICK

  • 6년 만에 솔로 데뷔…(여자)아이들 우기, 앨범 선주문 50만장 "편파방송으로 명예훼손" 어트랙트, SBS '그알' 제작진 고소 강릉 해안도로에 정체모를 빨간색 외제차…"여기서 사진 찍으라고?"

    #국내이슈

  • 美대학 ‘친팔 시위’ 격화…네타냐후 “반유대주의 폭동” "죽음이 아니라 자유 위한 것"…전신마비 변호사 페루서 첫 안락사 "푸바오 잘 지내요" 영상 또 공개…공식 데뷔 빨라지나

    #해외이슈

  • [포토] 정교한 3D 프린팅의 세계 [포토] '그날의 기억' [이미지 다이어리] 그곳에 목련이 필 줄 알았다.

    #포토PICK

  • "쓰임새는 고객이 정한다" 현대차가 제시하는 미래 상용차 미리보니 매끈한 뒤태로 600㎞ 달린다…쿠페형 폴스타4 6월 출시 마지막 V10 내연기관 람보르기니…'우라칸STJ' 출시

    #CAR라이프

  • [뉴스속 인물]'뉴진스의 창조주' 민희진 대표는 누구 [뉴스속 용어]뉴스페이스 신호탄, '초소형 군집위성' [뉴스속 용어]日 정치인 '야스쿠니신사' 집단 참배…한·중 항의

    #뉴스속OO

간격처리를 위한 class

많이 본 뉴스 !가장 많이 읽힌 뉴스를 제공합니다. 집계 기준에 따라 최대 3일 전 기사까지 제공될 수 있습니다.

top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