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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업성장史]<31>정권에 찍히면 亡하고…눈에 들면 興했던 해방 직후 재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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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에 돈 댄 백낙승 재벌되고 김구에 줄 댄 최창학 탈세재판

'조방 낙면 사건'을 아시나요?
'조방'은 일제 강점기 때 일본 재벌 미쓰이물산이 부산에 세운 조선방직(주)의 줄임말이다. '낙면(落綿)'은 질이 떨어지는 면을 말한다. 한데 여기에 '사건'이 붙었다. 이른바 문제가 되는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는 얘기다.

사건의 내용인즉슨 이렇다. 사건의 시점은 1951년 3월 14일로, 한창 전쟁 중이었다. 북한군의 탱크에 밀려 속절없이 부산까지 피난을 내려가다 다행히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해 '조방낙면사건'이 일어나기 바로 이틀 전, 국군과 미군이 서울을 재탈환했다는 반가운 소식이 단비처럼 들려오던 무렵이었다.

한데 이 날 피난지 부산에서 예의 조방의 임직원 20여명이 전격 구속됐다. 혐의는 놀랍게도 적을 이롭게 하였다는 이적행위였다. 조방에서 군수용 광목을 만들었는데, 의도적으로 불량 면인 낙면을 혼합해 제품의 질을 떨어뜨렸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다시 말해 불량 광목으로 군복을 만들면 품질이 떨어져 작전 수행에 차질을 가져오게 되고, 그래서 결과적으로 적을 이롭게 했다는 알 수 없는 얘기였다.
물론 종전과 함께 일본이 남기고 간 적산기업이었던 조방의 이사이면서, 실질적인 경영주였던 김지태(훗날 MBC ㆍ부산일보 사장) 또한 기소됐다. 그가 적산기업 조방을 불하받기로 사실상 내정된 상태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이것이 곧 '조방낙면사건'이다. 여기까지가 겉으로 드러난 사건의 전말이다.

그런데 사건의 전말을 조금만 더 깊이 들여다보면 금방 얘기가 달라진다. 이 사건이 일어났을 땐 대통령 이승만이 재선을 위해 신당인 자유당을 창당하면서 많은 정치 자금이 필요로 하던 시기였다. 민주당은 그런 이승만의 재선을 막기 위해 개헌에 반대하고 나섰고, 당시 무소속 국회의원이기도 했던 김지태는 민주당의 자금줄 역할을 하고 있었다. 대통령 이승만의 눈에 김지태가 곱게 보일 리 만무했다. 이쯤 되면 낙면사건이라는 것이 얼마나 얼토당토 않는 억지소리인가를 어렵잖게 눈치 챌 수 있게 된다.

재판 결과 역시 그렇게 나왔다. 대구고등법원에서 조방낙면사건은 무죄로 판결이 났다. 하지만 사건은 이미 널리 각인돼 김지태의 이미지가 한참 땅에 떨어진 뒤였다. 결국 김지태에게 불하되려던 적산 조방의 계획은 취소될 수밖에 없었고, 대신 대통령 이승만의 양아들로 자처하고 다니던 강일매에게 조방이 돌아갔다. 훗날 김지태는 조방을 노린 자들이 '김지태에게 조방이 넘어가면 야당의 정치 자금 노릇을 하게 될 것이다'는 간언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사건이라고 회고했다.

공장 부지 8만평, 공장 건물 54동, 종업원 수 2000여명, 자본금 약1조2000억원의 국내 최대 규모로 부산의 제조업 기업시대를 이끌었던 조방은 그와 같이 강일매에게 넘어갔으나, 강일매는 한마디로 역량 부족이었다. 이후 조방은 경영 부실로 문을 닫아야 했고, 1968년 부산시가 부지를 매입해 시민회관과 평화시장 등지로 개발하면서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됐다.

흔히 돈과 권력은 불가분의 관계라고 일컫는다. 다시 말해 기업가는 정치권력에 너무 가까이해서도, 그렇다고 너무 멀리해 눈에 벗어나 밉보여서도 안 된다는 얘기다. 구분(九分)은 모자라고 십분(十分)은 넘친다는 알쏭달쏭한 이웃사촌이랄 수 있다.

말할 것도 없이 일제 강점기 때 일제에 줄을 대지 않고 성공하기란 요원했다. 일제의 눈밖에 벗어나는 순간 말짱 끝장이었다.

그런 학습 효과 때문이었는지. 해방이 되자 경제계는 너도나도 정치권력에 줄을 대느라 바빴다. 일본에 짓눌려 오랫동안 오금을 펴지 못하던 기업인들이 해방과 더불어 압박에서 벗어나자, 정치권력이라는 알쏭달쏭한 이웃사촌을 찾아 나섰다. 가진 자는 가진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서, 갖지 못한 자는 축재의 기회를 새로이 마련해보고자 저마다 동분서주했다. 조방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강일매는 되지 못할지언정 적어도 김지태 꼴은 되지 않아야겠다며 백방으로 뛰었다.

하기는 제아무리 경제 활동이 국가 통제에 얽매이지 않고 경제 단위의 경쟁에 맡겨지는 자유경제라 한다지만, 혼돈의 시기에 축재를 하는 길이란 정치권력만한 투자도 또 없었다. 사회가 혼란한 때일수록 정치권력의 비호만한 지름길도 딴은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해방과 더불어 지금까지 불어오던 바람의 방향이 돌연 바뀌었다. 일제 강점기 때 성공했던 사람, 재산을 모았던 사람은 무조건 배척받는 사회 분위기였다.

그러나 정치권력은 사분오열돼 있었다. 해방 직후 정치권력의 헤게모니는 임정을 이끌어온 김구, 미주에서 독립운동을 한 이승만, 국내에서 활약해온 여운형, 한국민주당의 김성수, 그리고 미군정청 등으로 나눌 수 있었다.

따라서 정치권력에 줄서는 것 역시 저마다 다 달랐다. 금광왕 최창학은 김구, 태창재벌 백낙승은 이승만, 광산업 재벌 이종만은 여운형, 경성방직의 김연수는 형 김성수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으며, 화신백화점의 박흥식, 동일은행의 민규식, 자동차왕 방의석 등도 모두가 당대 정치권력에 줄을 댔다.

그 밖에 중소기업가나 재계의 신입생들은 빈자리가 없는 거물 정치권력 대신 실리를 선택했다. 미군정청의 요인이나, 거기에 줄이 닿는 실력자를 찾아 나섰다.

사실 해방 직후 황금알을 낳는다는 일본 적산기업의 불하나, 정크무역ㆍ 마카오무역을 하려면 미군정청과 줄이 닿아야만 했다. 미군정청 재무국장 골든 중령이나, 군정의 요직을 맡고 있던 정 아무개, 장 아무개, 조 아무개의 끗발이면 누구나 한 건 할 수 있는 그런 분위기였다.

그런 만큼 해방 직후 경제계엔 정치바람이 상당히 거세게 불었다. 또 그와 같이 서로 다른 풍향에 따라 경제계의 희비도 엇갈렸다. 무상한 정치군력에 따라 경제계의 명운 또한 크게 달라졌던 것이다.

우선 성공한 기업가는 백낙승 등이 있었다. 본고 연재<3회> <종로 육의전의 마지막 후예 '대창무역'> 편에서 얘기한 것처럼, 이승만에게 막대한 정치자금을 대어주면서 일약 태창재벌로 몸집을 불리는 남다른 수완을 발휘해냈다.

이같이 성공한 자가 있으면 으레 실패한 자도 있기 마련이다. 그 대표적인 이가 금광왕 최창학이었다. 금광을 쫓아 무작정 집을 떠난 지 10여 년 만에 드디어 노다지의 꿈을 찾아내 일본광업(주)에 800만원(지금 돈 약 9600억원)에 매각하면서 단숨에 조선 3대 재벌이 된 그는, 당시 경성에서 가장 호화로운 1700평의 대지 위에 290평짜리 2층 양옥 저택인 죽첨정(지금의 강북 삼성병원)을 짓고 '자선사업이고 육영사업이고 영리사업이고 아즉 아무 데도 손을 대인 곳이 업이' 오로지 사치와 향락에만 매진했다.

물론 해방 이후에도 최창학만큼 막대한 거금을 가진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그는 여전히 영리사업을 따로 벌이지 않은 채 무역업자들을 상대로 고리대금업을 하고 살았다. 해방 직후 경제계를 뜨겁게 달구었던 정크무역에서 마카오무역이 종료될 때까지, 이른바 무역업자치고 최창학의 돈줄에 기대지 않은 이는 거의 없었다고 전한다.

어쨌든 이런 최창학은 일본 육군에 전투기 8대를 헌납한 데 이어, 매일신보 상무이사와 임전보국단의 이사라는 직함을 지닌 채 해방을 맞이했다. 그의 '애국적 행위'는 하루아침에 '친일'이라는 돌이킬 수 없는 낙인이 됐고, 이제 다시 살아남으려면 또 다른 노선을 찾아야만 했다.

그럴 때 줄을 댄 것이 임정이었다. 상하이에서 귀국한 김구에게 자신이 살던 저택을 헌납하면서 재빨리 임정에 줄을 설 수 있었다.

그러나 최창학의 이런 줄서기는 결과적으로 패착이었다. 그로부터 5년 후 김구는 의문의 암살을 당하고 숙적이었던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최창학은 다시금 고립무원의 처지에 놓이게 됐다. 이승만 정권이 들어서면서 최창학은 모든 정책 사업이나 혜택에서 제외되었음은 물론이고, 집요한 세무조사에 시달려야 했다.

시련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해방 이후 사회 혼란이 거듭되는 가운데 날이 갈수록 인플레가 가중되는 바람에 최창학이 가진 현금의 가치는 낙엽처럼 떨어졌다. 더욱이 한국전쟁 이후 경제재건 과정에서 상업자본을 산업자본으로 갈아타는 기회마저 놓쳤다. 그리하여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에 줄을 대고 미국의 원조자금으로 몸집을 불린 신흥재벌에 뒤처지게 됐고, 격차 또한 점점 더 벌어지고 말았다.

급기야 집요한 세무조사 끝에 탈세 재판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57년, 그는 마치 현실에서 도피하듯이 뜬금없이 오산중ㆍ고등학교를 인수해 재단이사장에 취임하게 된다. 오산중고는 남강 이승훈이 평안도 정주에서 설립했으나 한국전쟁 당시 피난해 서울에 재건한 민족사학으로, 그가 인수하기 직전까지만 해도 심각한 재정난을 겪고 있었다.

그런데 재단과 학교장 사이에 갈등이 빚어지면서 종래에는 '학생 동맹 휴학'이라는 초유의 사건으로 비화하고 말았다. 최창학은 이 동맹 휴학의 후유증을 미처 다 수습하기도 전인 같은 해 10월 갑자기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조선 최대 재벌 민영휘에 이어 두 번째로 천만장자의 반열에까지 올랐던 금광왕의 죽음치고는 너무나 허무한 최후였다. 그리고 그의 이런 최후는 신문 사회면 한쪽 귀퉁이에 겨우 몇 줄의 부고만이 실렸을 따름이다.

그런 반면에 정치권력의 줄서기에서 불운했던 기업가도 없지 않았다. 경방의 김연수가 바로 그런 경우였다.

본고 연재<22회> <경성방직, 근대기업을 넘어 한국 산업의 아버지가 되다> 편에서 이들 형제에 대해 얘기한 것처럼, 김성수는 언론(동아일보)과 교육사업(고려대학교)에 전념키 위해 초기부터 경방의 경영을 동생 김연수에게 넘기면서 사실상 손을 뗐다. 그리고 해방 이후에도 한동안은 자신의 평소 신념대로 언론과 교육사업에만 전념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조병옥 박사의 끈질긴 간청과 해방 공간의 혼란 속에서 민족진영의 정당이 필요하다는 인식 아래 한국민주당을 결성하고 당수에 피선된 데 이어, 1951년에는 국회에서 제2대 부통령으로 선출됐다.

김성수는 '나는 적임자가 아니다'라며 부통령 취임을 한사코 거부했다. 그러나 '누구도 민의를 거역할 권리는 없다'라는 설득에 그만 고집을 꺾을 수밖에 없었다.

이쯤 되자 김연수 또한 어쩔 수 없이 한민당 쪽으로 선회됐다. 일제 강점기 동안 경방을 이끌었던 기업가로 친일 문제가 불거지자, 해방 이후에는 기업 일선에서 물러나 칩거하고 있는 상태였다. 한데도 사람들은 김연수를 친 한민당 쪽으로 이미 분류해놓고 있었다.

그러나 재선에 눈이 먼 대통령 이승만의 전횡과 반민주적 처사를 고발하기 위해 김성수는 끝내 부통령직을 사임한 뒤, 본래의 언론과 교육사업으로 돌아갔다. 그러다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인 1955년 이른 봄 65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국민장으로 치러진 장례식에는 전국에서 무려 100만 인파가 몰려들어 김성수의 죽음을 애도했다고 한다.

하지만 김연수는 이미 자유당 정권과 소원해질 대로 소원해진 관계에 있었다. 또 그런 연유로 인해 반세기 가까이 지켜온 경제계 정상의 자리를 그만 양보해야 했다.

뿐만 아니라 많은 사업 기회조차 놓치기까지 했다. 일본이 남겨두고 간 적산기업을 거의 줍다시피 불하받아 몸집들을 키워나갔으나, 그의 이름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곧이어 터진 한국전쟁 또한 다시없는 절호의 기회였다. 전쟁 직후 파괴된 기간 시설의 복구 사업, 예컨대 비료ㆍ시멘트ㆍ유리ㆍ면방적기ㆍ동력기계ㆍ제지공장 등의 자본재 사업에 원조자금이 쏟아진데다, 정부로부터 배정받은 기업들은 낮은 금리의 특혜 융자와 더불어 특별 환율 적용까지 얹어 받았으나 김연수의 이름은 번번이 빠져 있었다.

그 밖에도 재벌화의 가능성을 제시해준 사업 분야 중의 하나는 군침이 꿀꺽 넘어간다는 군납사업이었다. 관납사업 또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식은 죽 먹기 가운데 하나였다. 이 시기 '자유당 5인조'로 불리던 대동공업, 조흥토건, 극동건설, 현대건설, 삼부토건 등이 정부 발주 공사를 거의 독점하다시피 하는 가운데 김연수의 이름은 일체 배제됐다.

화신백화점의 박흥식, 광산 재벌의 이종만, 자동차왕 방의석, 동일은행의 민규식 또한 저마다 유력 정치인에 부지런히 줄을 댔으나, 역시 패착으로 귀결됐다. 이들에게 정치권력은 투자도 지름길도 아닌, 종말을 재촉하는 블랙홀이 되고 만 셈이었다.

박상하 작가



아시아경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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