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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업성장史]<29>'조방앞' 지명에 남은 조선방직…그곳 女工들이 釜山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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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적한 부산포구 화려한 변신
개항과 함께 일본인 몰려들어
항만·철도 갖춰 회사들 번창
조선방직·조선중공업 '투톱'
1930년대 공황위기 극복했지만
기업규모 양극화 심해지고
수출부진 겹쳐 급속한 몰락


조선방직에서 근로자들이 일하고 있는 모습

조선방직에서 근로자들이 일하고 있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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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은 우리 근대사의 자궁이었다. 개항(1883) 이래 서구로 통하는 유일한 관문이었으며, 난생 처음 보는 이양선(異洋船), 기차를 비롯한 예기치 않은 서구 문명의 맹아였다. 해방 직후 정크무역에서부터 마카오무역에 이르기까지, 우리 근대사를 가장 뜨겁게 달군 현장이었다. 또 그와 같이 근대사와 궤적을 같이 하며 팽창해온 항도이기도 했다.
이런 인천에 비해 다소 뒷전으로 밀려나 있는 듯이 보이나, 우리 근대사를 언급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항도가 또한 부산이다.

부산 하면 우선 다음 두 가지 의문을 떠올리게 된다. 과연 어떻게 수도 경성에 이어 제2의 도시로 그토록 빨리 성장할 수 있었는지, 과연 어떻게 해방 전후 전국 최대 공업 도시로 성장할 수 있었는지 말이다.

사실 일본에 의해 1876년 강제 개항되기 이전만 하더라도 부산은 한낱 보잘 것이 없는 개의 어귀에 불과했다. 이웃하고 있는 동래부는 알아도 부산포를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았다. 한성, 평양, 개경, 전주, 나주, 경주, 상주, 진주, 함흥, 안주와 같은 큰 고을 축에는 끼지도 못하는 그저 흰 갈매기들만이 한가롭게 날던 이름 없는 포구였을 따름이다.
그러던 부산 포구에 개항과 동시에 일본인들이 꾸역꾸역 몰려들기 시작했다. 모르긴 해도 자국에서 가깝다는 지리적 이점이 컸을 것으로 보인다. 대한해협을 건너온 일본인들이 날로 증가하면서 개항된 지 30년만인 1906년에는 전체 인구가 7만 명(일본인 약 1만6000명)이 넘는 항도로 팽창해 있었다. 가구 수만 보더라도 수도인 경성이 6만4582호, 인천이 1만3504호, 부산이 2만492호로, 이때 이미 경성에 이어 어느새 전국 제2의 도시로 성큼 부상해 있음을 알 수 있다.

더 흥미로운 건 부산이 경성과 인천보다 기업이나 공장이 훨씬 더 많았다는 점이다. 당시 조선총독부의 통계에 의하면 해가 거듭될수록 그 폭이 커져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조선방직 포스터

조선방직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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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 이후 일본(민간)인들이 대한해협을 건너 부산으로 들어왔던 것은 사업 기회를 찾아서였다. 비록 불법적이고 투기적인 이윤을 노렸다고 하더라도 부산이 상대적으로 경성이나 인천에 비해 기업가적 성향이 강한 곳이었음을 이해할 수 있다. 그만큼 부산이라는 항도가 일본인들에게 사업을 벌일 수 있는 조건이 유리하고 기회가 많았으며 그로 인해 일본인들의 이민이 부산으로 더 적극적으로 움직였다고 볼 수 있다.

부산이 기업가적 성향이 강한 항도로 팽창한데에는 단순히 일본과 거리가 가깝다는 지리적 이점만이 있었던 건 아니다. 그러한 이점 말고도 항만과 철도와 같은 사회간접자본 또한 빼놓을 수 없었다.

부산만은 원래 섬으로 둘러싸여 파고가 낮고 수심이 깊어 천혜의 포구였다. 그러나 해안과 산이 가까워서 항만 부지가 많지 않았다. 때문에 개항 이후 곧바로 개펄을 메워 매립지를 늘려나갔다.

큰 선박이 정박하려면 잔교가 필요했는데 부산은 개항된 지 얼마 되지 않은 1906년 10월에 이미 폭 10m, 길이 180m의 제1잔교가 건설됐다. 잔교에 철도마저 들어왔기 때문에 선박→제1잔교→경부선→경의선→압록강 철교를 따라 멀리 만주까지 곧바로 연결된 셈이었다.

하지만 대한해협을 건너오는 선박과 화물이 날로 폭주했다. 결국 1912년에는 제1잔교에 이어 제2잔교가 건설됐다. 제1잔교는 여객선이, 제2잔교는 화물선이 정박하는 전용 부두로 정착 됐다.

이처럼 부산항이 정비돼 가자 항로 또한 늘어났다. 그때까지 부정기 항로였던 부산~시모노세키 사이에 1905년부터 정기선인 관부연락선이 취항하기 시작했다. 좀 더 훗날이긴 하지만 1937년에는 부산에서 외국의 22개 항구에 국제 항로가 연결됐으며, 이 국제 항로를 16개 해운회사가 취항했다.

한편 철도 부설 또한 종횡으로 뻗어나갔다. 1905년 경성~부산의 경부선에 이어 삼량진~마산 사이에 기차가 달리기 시작했고 1923년에는 마산~진주 사이에 철도가 연결됐다. 이보다 한 해 앞서 송정(광주)~순천 사이에 철도가 개통되면서 1923년에는 진주~순천 사이의 불편은 있었으나, 부산에서 호남 내륙까지 철도로 수송할 수 있게 됐다.

부산에는 자연스레 시장이 발달하고 상거래가 증가했다. 상거래의 수요에 따른 기업과 공장들도 잇따라 들어섰다.

부산에 맨 처음 창업된 제조업 기업은 1903년 자본금 1만7500원(지금 돈 약 21억원) 규모의 일한정미(精米)소였다. 일한정미소는 이듬해 일조정미소로 회사명을 변경하고 자본금을 5만원(지금 돈 약 60억원)으로 대폭 확대했다.

부산전등(電燈)이 이미 1901년에 창립됐지만 제조업이 아닌 상업회사였다. 부산수산 또한 영업 목적이 어류 잡매와 제조로 돼 있었으나 주업종은 제조가 아닌 수산업이었다. 1904년 한국대염(臺鹽)이 창립됐으나 역시 제조업이 아닌 중개판매를 하다 1911년에야 제염 제조를 본격화했다. 부산연초(煙草)는 1907년에 창립됐지만 연초의 중개판매만 하다 1909년에야 비로소 연초 제조를 시작했다.

그러나 어떻게 된 일인지 1904년부터 1907년까지는 제조업 회사가 전연 창립되지 않았다. 그러다 1908년부터 다시금 부산제분(주), 서산주조(주) 등 제조업 기업들이 속속 창업되기 시작했다.

특히 부산전등은 일본인 기업이긴 했어도 자본금이 10만원(지금 돈 약 120억원)에 이르는 초기 부산에선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대기업이었다. 20세기 들어 전력은 자본을 움직이는 가장 기본적이고 대표적인 사회간접자본이라는 점에서 일찍이 부산에 이러한 전력회사가 들어섰다는 것은 그 의미가 자못 큰 것이었다. 그처럼 빨리 대규모 전력회사가 부산에 독자적으로 설립됐다는 것은 단순히 인구수나 일본인 거주지 등의 이유 말고도 회사와 공장 등 경제적인 측면에서의 전력수요가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부산에 세워진 식민지 초기의 제조업 기업들은 공업보다는 대부분 대일 수출을 위한 상업 중심이었다. 더욱이 한국인과 일본인이 공동으로 설립한 제조업 기업이 전국에 4개, 한국인이 단독으로 설립한 제조업 기업이 8개가 있었으나 부산에는 아직 한국인 제조업 기업이 하나도 없었다. 부산전등과 같은 대기업에서부터 영세한 기업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다 일본인 기업이었다. 따라서 일본과의 경제적 연관이 그만큼 깊을 수밖에 없었으며 부산경제의 부침을 그러한 외부 충격이 좌지우지했다.

하지만 외부 환경은 부산경제에 유리하게 전개됐다. 제1차 세계대전마저 벌어지면서 1916년부터 전쟁특수가 본격화됐다. 그와 함께 제조업 기업들의 창업도 활발하게 줄을 이었다.

부산에 한국인 최초의 제조업 기업이 세워진 것도 바로 이 무렵이었다. 1916년 자본금 5만원 규모의 경남인쇄가 그것이었다.

1930년대는 바야흐로 '제조업 주식회사' 시대였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깊어진 공황의 늪을 통과해가면서 부산의 제조업 기업들 역시 저마다 체질 개선을 요청받고 있었다. 그런 결과 1933년부터 자본금 10만 원 이상의 제조업 기업들 가운데 합명회사나 합자회사는 사라지고 오로지 주식회사만 존재하게 됐다.

공황기에 접어들기 전까지 부산의 제조업 기업들은 영세하기 짝이 없는 합명회사나 합자회사가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공황기에 생존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대규모 제조업 기업들은 주식회사 체제로 몸집을 불려나갔다. 공황기에 생존 경쟁이 보다 치열해지면서 몸집이 클수록 외부 충격에 효율적으로 대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1930년대 부산의 제조업 기업들은 공황이라는 위기를 통과해나가면서 그 대응책을 찾아가는 과정 속에 새로운 성장 토대를 구축한 시기였다고 볼 수 있다. 적어도 태평양전쟁 이전까지는 정체가 아닌 내재적인 대응구조를 만들어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공황기를 거치면서 부산의 제조업 기업들은 비단 체질 개선에만 머문 게 아니었다. 국내 수요의 한계를 넘기 위해 신상품 개발에 나서는 한편 마침내 해외시장에도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또한 기업 간의 정보, 원료, 유통 등을 비롯한 생산비를 절감하기 위한 노력으로 중화학공업 단지 등 같은 업종끼리의 집적지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이 무렵 부산의 수출입 대상 국가는 무려 97개국으로 급증하면서 이 같은 새로운 시장 개척과 함께 그에 따른 상품 개발이 공황기 부산에서 독자적으로 성장해 나갔다.

그러면서 공황기 이후에도 제조업 기업들의 창업 붐은 꾸준히 줄을 이었다. 1937년엔 자본금 10만원이 넘는 창업 기업만 해도 청수당정미(糖精米), 조선주물공업, 창교상점, 삼우상회, 부산제빙냉장, 조선법랑 등이 이름을 올리며 대열에 합류했다. 이처럼 창업 붐이 다시금 일면서 부산 공업이 왕성해져가자 당시 신문은 '장족발전의 부산 공업, 공장 550여 개'에 달한다는 기사를 내보낼 정도였다.

하지만 이 시기 뭐니 해도 부산의 제조업 기업들 가운데 조선방직㈜와 조선중공업㈜을 뛰어넘는 기업은 또 없었다. 초기 자본금 300만원(지금 돈 약 3600억원)으로 출범한 조선중공업은 최초로 철강으로 선박을 건조할 수 있었으며 이후 1950년대까지도 1000t급 이상의 대형 철선을 만들 수 있는 국내 유일의 전문 조선소였다.

한편 일본 재벌 미쓰이물산의 계열사로 일찍이 부산 범일동 일대에 터를 잡은 조선방직은 공장부지 8만평, 공장 건물 54동, 종업원 2000여 명의 당시 국내 최대 규모를 자랑했다. 또한 조선방직은 같은 해에 자본금을 1000만원(지금 돈 약 1조2000억원)으로 대폭 상향 증자하면서 '부산 제조업 기업시대'를 이끌었다.

더구나 부산경제는 1930년대 후반까지 전쟁특수가 연이어졌다. 1937년 상하이에서 분쟁이 일어나 중일전쟁이 본격화됐다. 동시에 부산의 공업기지 역할 또한 날로 비중이 높아갔다. 부산은 곧 전쟁특수 바람이 거세게 불면서 공장생산이 급속히 증가한데 이어 이듬해 일본은 부산~베이징 직통 열차를 운행하기 시작해 일본-부산-중국으로 이어지는 3국 직통로를 열었다.

1939년부터 일본이 미국과의 태평양전쟁을 준비하면서 부산 공업은 더욱더 전시물자 수요에 따른 급속한 생산 증대를 나타냈다. 그러면서 같은 해에 부산의 공장 생산액은 전년 대비 32.4%가 급등했고, 공장 수 또한 전쟁 이전의 최고 수준인 408개를 넘은 421개로 늘어났다.

부산은 이렇듯 일본의 전쟁경제에 점점 더 깊숙이 편입돼 갔고 아울러 부산의 공업기지 역할이 그만큼 더 커져 갔다. 부산에선 전쟁특수로 인해 공업생산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증대돼 갔을 뿐더러 더불어 제조업 기업의 창업 또한 활발하게 그 뒤를 이었다.

그러나 빛이 밝으면 그늘 또한 짙은 법이다. 부산의 공업은 전쟁특수에 기대어 공장들마다 불야성을 이루고 있는 반면에 다른 한쪽에서는 예기치 않은 부작용도 불거져 나왔다. 미국과의 태평양전쟁이 진행되면서 그에 따른 시장 외적인 영향이 커져간 것이다. 무엇보다 기업 규모에 따른 양극화 현상이 심화돼 갔다.

뿐만 아니라 부산의 제조업 기업들은 양극화에 이은 동남아 수출시장의 상실, 경쟁의 왜곡 등 전체적인 시장 왜곡화를 다른 지역의 공업도시들보다 더 심하게 겪어야 했다. 그런 결과 1930년대 공황기에 구축됐던 자립적인 성장 구조조차 잃어버리고 말았다. 지역적으로 보았을 때 식민지 시기 전체를 통해 일본으로의 의존성이 강화된 데다, 태평양전쟁을 치르면서 공황기에 구축됐던 성장 구조마저 잃어버리게 된 부산은, 결국 몰락의 수순을 밟을 수밖엔 없었다. 불야성을 이루던 공장들은 이윽고 기계가 멈춰 섰고, 기술자들이 떠나간 자리는 다시 메울 길이 없었다. 해방 이후 부산의 제조업 기업들은 '제조업의 공동화'로 다른 어느 지역의 공업도시들보다 더 큰 타격을 입어야만 했던 것이다.

결국 부산은 해방 직후 대한해협을 오가는 귀국선들로 잠시 떠들썩하다 말았다. 오래지 않아 귀국선들의 뱃고동 소리도 멈추면서 부산은 이내 알 수 없는 공허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에 반해 인천 쪽이 다시 시끌벅적해졌다. 개항 초기 잠깐 동안 반짝이다 주도권을 부산에 내어주고 만 인천은 해방 직후 연이은 정크무역과 마카오무역으로 '무역의 시대'를 활짝 열어 보이면서 다시금 전성기를 구가하게 된 것이었다.

박상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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