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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업성장史]<28>한국 기업들, 마카오·홍콩·대일무역으로 국제비즈니스를 익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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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카오무역선, 조선화약 창고의 먼지까지 싹쓸이

▲한국 국적 최초의 무역선인 조선우선 소속의 앵도환(櫻島丸)호. 1948년 화신무역상사가 이 배를 이용하여 홍콩과 마카오에 건어물과 한천을 수출했다. 앵도환호는 1948년 12월 남북교역차 흥남항에 입항후 남한의 반민특위사건으로 북한에 압류됐다.

▲한국 국적 최초의 무역선인 조선우선 소속의 앵도환(櫻島丸)호. 1948년 화신무역상사가 이 배를 이용하여 홍콩과 마카오에 건어물과 한천을 수출했다. 앵도환호는 1948년 12월 남북교역차 흥남항에 입항후 남한의 반민특위사건으로 북한에 압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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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직후 패망한 일본으로부터 약탈한 물자를 서로 교환하는 방식의 정크무역은 그야말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다. 비록 밀무역이긴 했어도 당시 정크무역에 뛰어들지 않은 이는 재계에 이름조차 올리지 못할 만큼 대단한 열풍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정크무역은 겨우 이태를 넘기지 못했다. 중국의 만주와 북지나를 점령하고 있던 공산군이 점차 남진해 정크무역의 본산이었던 톈진과 다롄, 칭다오, 상하이를 차례대로 점령하면서 서해를 건너오던 정크선들의 발길이 뚝 끊기고 만 것이다.

그러나 아쉬워할 겨를이 없었다. 중국에서 곧바로 다시 한 번 손을 내밀어왔다. 해방 직후 경제 활동이 거의 단절된 상태에서 부족한 물자를 공급받는 길이란 오직 무역 밖에 없었던 우리에게 이번에는 합법적인 무역 거래를 제의해왔다. 이번에는 중국의 재벌과 군벌들이 한국과의 무역 거래를 요청하고 나선 것이다.
두 나라는 피차 한때 정크무역으로 쏠쏠한 재미를 보아 싫지 않은 터였다. 게다가 우리보다 더 아쉬운 쪽은 중국이었다. 모택동의 공산군과 한창 전쟁 중이었던 장개석의 중국은 무엇보다 군수물자 공급이 절실했다. 중국의 재벌과 군벌들은 일본이 미처 다 가져가지 못한 전략물자를 수집해가기 위해 이번에는 전쟁상인으로 한국시장을 노크했다. 이른바 '마카오무역'의 시작이었다.

1947년 3월, 영국 무역선 페어리드호가 마카오에서 펄프, 생고무, 양복옷감 따위와 같은 고급 소비재 물자를 잔뜩 싣고서, 정크선박들이 떠나간 인천항에 뱃고동소리도 요란하게 입항했다. 당시 영국령 홍콩의 무역업자들은 수출입에 대한 영국 총독의 통제가 강화돼 홍콩이나 동남아 각지로부터 수집한 물자에 대해 수출 허가를 받아내지 못하자 홍콩에서 가까운 포르투갈령 마카오 정청에서 수출 허가를 받아 선박을 띄울 수 있었다. 마카오무역이라는 용어도 여기서 비롯됐던 것이다.

영국 무역선 페어리드호가 싣고 온 각종 고급 소비재 물자는 삽시간에 시중으로 흘러 들어갔고 이때부터 좀 눈에 띄는 고급 물품이다 싶으면 으레 마카오제라고 일컬었다. 마카오양복을 입은 자를 '마카오신사'라고 불렀던 것도 바로 이 무렵부터였다.
그도 그럴 만했던 게 마카오에서 들여온 양복지는 지금껏 경험해보지 못한 것이었다. 지구촌에서도 손꼽힌다는 영국제 첨단 제품이었다. 가격 또한 입이 떡 벌어지도록 고가였다. 마카오양복 한 벌 값이 당시 일반 회사원 3개월치 월급에 해당되는 6만원을 호가했다. 한데도 없어서 못 팔 지경이었다. 당장 먹을 식량이 없어서 서울역을 이용하는 하루 승객 2만명 가운데 그 절반가량이 식량을 구하러 지방으로 내려가고 있는 시절에도 사람들은 마카오양복에 열광했다.

먼저 마카오나 홍콩으로 무역을 하는 업자들은 바이어들을 만나 협상을 성공하기 위해서라며 너도나도 마카오양복을 지어 입었다. 장안의 재력가나 멋쟁이들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이른바 종로, 동대문, 명동파로 불렸던 김두환,이정재, 이화룡 등과 같은 주먹패거리까지 다퉈 마카오양복을 빼입고서 거리를 누볐다.

변변하게 먹을 것조차 없어 저마다 주리고 있는 시절에 이들의 분에 넘치는 옷차림은 모두의 관심을 끌만했고 그들을 일컬어 마카오신사라고 불렀다. 마카오신사야말로 해방 직후 첨단 패션을 일컫는 대명사였으며, 또한 부유함의 상징이기도 했다.

참고로 당시 일반인들은 주로 미 군복을 염색해서 양복 대신 입고 다녔다. 양복지가 없지는 않았으나, 일제 강점기에 설치돼 있던 구식 기계를 수리해 생산한 것이라서 품질이 거의 군용 담요 수준이었다. 일반인들이 염색한 미 군복의 양복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1956년 이병철의 제일모직에서 국산 양복지를 생산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어쨌든 영국 무역선 페어리드호가 인천항에 처음 입항했을 때 가장 먼저 무역 거래를 한 기업은 박흥식의 화신무역도, 무역 면허 1호인 김익균의 건설실업도, 거래 실적 1위인 최태섭의 삼흥실업도, 혜성처럼 나타난 김인형의 동아상사도 아니었다. 이들보다 한 발 앞서 잽싸게 정보를 입수한 염익하의 금익통상과 인천 지역에서 무역업을 하던 김규면의 삼양무역 몫이었다. 물론 페어리드호에 이어 다른 무역선들이 인천항에 잇달아 들어오면서 그러한 무역회사들 역시 일제히 참여하게 되었지만 말이다.

마카오 무역선들이 싣고 온 상품들은 때마침 물자 부족에 허덕이고 있는 우리의 입맛에 딱 맞는 것이었다. 생고무, 양복옷감, 손목시계, 면사, 양모, 페니실린, 사카린 따위였다.

대신 그들이 싣고 간 것은 대부분 군수용 물자였다. 대한중석에서 흘러나온 헤로중석과 헤로망간, 조선화약(훗날 한국화약)의 창고 안에서 유출된 염소산가리와 같은 화약 원료와 플라스틱파이프를 비롯해, 미군정청에서 불하한 지프나 트럭 등의 자동차를 해체해서 부품으로 분해해 가져갔다. 특히 부평에 자리한 조선화약 부평조병창에선 창고 안의 재고에서부터 각종 공구, 심지어 바닥의 먼지까지 싹싹 쓸어갔다는 후문이 전해지고 있다.

전쟁 중이었던 중국으로선 그만큼 군수용 물자가 절실히 필요했다. 당시 중국의 무역업자들은 대부분 군벌과 관계가 깊거나 아니면 무역업자를 가장하고 들어온 민간인 복장을 한 군인들이 적지 않았다.

이런 마카오무역은 앞서 정크무역과 마찬가지로 한 몫 단단히 잡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 중에서도 단연 돋보였던 이는 영화물산의 신영균과 조선화약 부평조병창의 관리인 김 아무개였다.

대한중석의 창고 안에 쌓여있던 헤로중석과 헤로망간의 재고품을 불하받은 영화물산의 신영균은, t당 평균 5500달러씩 받으며 모두 2000t 가량을 선적하면서 단숨에 1000만 달러가 넘는 수출고를 올렸다. 같은 해 우리 나라 전체 수출고 1억 달러 가운데 10분의 1을 기록하는 놀라운 성과였다. 조선화약 부평조병창의 관리인 김 아무개 또한 돈벼락을 맞으며 횡재했다. 최기호의 영풍상사가 마카오에 철광석을 수출하면서 기반을 잡은 것도 바로 이 무렵이었다.

이쯤 되자 다급해진 쪽은 홍콩의 영국 정청이었다. 그동안 홍콩에서 선적된 물자들이 마카오를 통해 우회 수출된다는 사실을 뒤늦게야 깨닫고서 한국에 대한 직접 수출 허가를 적극적으로 발급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마카오와 홍콩무역은 사실상 수출 허가를 어느 지역에서 받았느냐에 따라 구분이 됐을 뿐 화물선에서부터 수출 물자, 무역업자 등에 이르기까지 내용 면에선 달라질 게 하나도 없었다.

마카오무역의 열풍은 같은 해에 중국 5대 재벌 가운데 한 사람인 이옥청 회장이 화물선 산제르니모호를 타고 직접 인천항으로 들어오면서 그 절정을 이뤘다. 산제르니모호의 선주이기도 한 그는 서울에 체류하는 동안 하루는 명월관에서 술을 마시고 나오는 길에 그만 정체불명의 괴한들에게 납치돼 당국을 깜짝 놀라게 했다. 수도청장 장택상의 특명으로 대대적인 수사를 벌인 끝에 가까스로 구출되기까지 한바탕 소동이 일기도 했다는데 이옥청은 자신을 구해준 수도청에 당시로선 입이 딱 벌어질 거액인 500만원을 사례로 기부해 세간의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그러나 마카오무역 역시 정크무역과 마찬가지로 그리 오래 가지는 못했다. 일본이 패망하면서 미처 다 가져가지 못한 군수용 물자라는 게 샘물처럼 무한정 솟는 것도 아니어서 그 해 세밑에 이르기도 전에 창고 속의 재고 물자가 벌써 바닥을 드러내고 말았다. 한국이나 중국 모두에게 아쉬운 일이었지만 어차피 처음 시작할 때부터 예견된 종말이었다.

1947년 8월 아이비스호라는 홍콩 무역선이 가장 가까운 항로라는 이유를 들어 인천이 아닌 부산항에 입항하여 닻을 내리면서 인천항은 정크무역에 이어 마카오무역마저 시나브로 그 종지부를 찍어야 했다. 인천항 시대가 저물고 부산항을 중심으로 한 홍콩무역의 시대가 활짝 열린 것이다.
정부에서도 뒤늦게 해외 수출시장의 가치를 발견하기 시작했다. 정크무역과 마카오무역의 열풍이 불어 닥칠 때까지만 해도 불구경하듯 바라만 보고 있던 정부가 홍콩무역이 시작됐을때쯤 세관국에 이어 조선환금은행을 발 빠르게 신설하고 나섰다.

이같이 정부의 지원 체제가 정비되면서 무역업계는 홍콩을 넘어 대일(對日)무역, 대미(對美)무역으로 점차 확대시켜 나갔다. 특히 해방 이후 부산하게 대한해협을 오가던 선박들의 발길이 끊어지고 말면서 그동안 파리만 날리던 대일무역은 이내 홍콩무역을 앞지를 무서운 기세로 하루가 다르게 뜨거운 열기를 더해갔다.

정부는 여기서 머물지 않았다. 50년대 초에는 새로운 수출시장을 찾아 동남아 지역에 민간무역사절단을 파견하기도 했다. 이때 김인형의 동아상사 등은 동남아 너머 인도의 캘커타까지 진출하여 각종 잡화 주문을 받아오기도 했다.

이처럼 해외 무역이 날로 그 열기를 더해가자 마침내 우리 쪽에서도 무역선을 직접 띄우기 시작했다. 1947년 미군정청은 적산(敵産) 해운회사였던 조선우선의 관리인으로 포항에서 삼일상회를 경영하면서 무역업계에 투신한 김용주(훗날 전방그룹 회장)를 임명하고 조선식산은행으로부터 500만원을 대출받을 수 있게 해줬다.

김용주의 조선우선은 이 대출금으로 일본이 남겨두고 간 낡은 화물선을 수리해서 이듬해 봄 홍콩 항로에 처녀 취항시켰다. 선박 명은 '앵두나무 섬'이라는 앵도환(櫻島丸)이었다. 앵도환은 한천(식용과 공업용의 우뭇가사리)을 싣고 홍콩으로 향했다. 부산항으로 돌아올 땐 생고무와 펄프 따위를 수입해왔다. 이렇듯 앵도환은 한국 국적을 가진 선박으로서는 처음으로 바다 건너 대외 항로에 취항한 첫 선박이 됐다. 이듬해에는 앵도환에 이어 금천호까지 정기 취항을 하게 되면서 홍콩무역은 더욱 활기를 띠어갔다.

이 시기 홍콩무역을 주도했던 기업은 박흥식의 화신무역, 김정도의 중앙교역, 김인형의 동아상사였다. 그러나 동아상사는 인삼 수출에 크게 실패하면서 거의 파산 직전에까지 내몰렸다. 다행히 전택보의 천우사와 손을 잡고 일본에 가마니를 수출하면서 가까스로 회생했다.

사실 이 때까지만 해도 일본과의 교역은 공식적으로 중단된 상태였다. 다만 미군정청의 교섭으로 소금, 김, 멸치 등을 수출하고 대신 석탄을 수입하는 거래가 있긴 했으나 오직 정부 간의 교역이었을 따름이다.
1949년 동아상사와 천우사가 일본에 가마니 30만 달러어치를 수출한 것이 해방 이후 최초의 대일 민간 교역이었다. 다시 말해 가마니가 대일 수출 제1호 품목이 된 셈이다. 가마니 수출은 한 해 전에 한국과 일본의 미군정 당국끼리 수출하기로 이미 결정되어 있었으며, 당시 농업금융조합이 수집해 놓은 가마니 500만장을 두 민간 상사가 대행 수출한 것이다.

당시 가마니는 쌀이나 보리, 콩, 고구마, 감자 등의 양곡이나 소금, 석탄과 같은 물자의 주요 포장재로 쓰였다. 가마니는 1900년 초에 일본에서 들어왔다. 가마니라는 명칭도 일본말 '가마스'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1909년 당시 조선통감부에서 펴낸 '한국시정연보'에 의하면 1908년 일본에서 새끼틀 19대, 일반 가마니틀 495대, 마키노식 가마니틀 50대가 들어왔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때가 가마니 제작의 시초일 것으로 보고 있다.

동아상사는 이처럼 대일무역을 가장 먼저 선도했다. 가마니를 수출하면서 처음으로 대일무역의 길을 연 동아상사는 이후에도 김과 멸치 따위의 대일 수출을 지속적으로 확대시켜 나갔다. 또 이를 계기로 일본에 지점을 설치하고 정식으로 여권까지 발급받아 일본을 수시로 왕래하게 되면서 이런 동아상사를 뒤따라 대일 무역에 뛰어든 민간 상사도 하나 둘 늘어나기 시작했다. 전택보의 천우사와 김용주의 대한물산 또한 동아상사에 이어 국내 무역회사로는 처음으로 일본에 지점을 설치하면서 본격적인 대일 무역에 뛰어들었다.

해방 직후 곧바로 시작되면서 중단 없이 이어져나간 정크무역에서부터 마카오무역, 홍콩무역, 대일무역은 일찍부터 해외시장의 가치를 이해하고 발견케 하는 계기가 돼줬다. 본격적인 경제 개발이 시작되기 이전부터 해외시장을 개척하고 아울러 학습하는 중요한 경험이 됐음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그 중에서도 마카오무역은 우리 기업들이 처음으로 비즈니스를 익힐 수 있었던 소중한 기회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또 이때의 주역들이 결국 훗날 한국경제를 앞장서 이끌어나가게 된다.



박상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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