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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업성장史]<27>해방 직후 물자 바닥난 조선의 살길은 무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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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정크무역 경험, 박흥식·설경동 수출선에 오르다

▲해방 후 인천항에 정박했던 중국 정크무역선

▲해방 후 인천항에 정박했던 중국 정크무역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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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식민지 지배로부터의 해방은 곧 연속과 단절의 측면이 동시에 작용하면서 진행되는 것을 뜻했다. 하지만 해방 초기에는 단절의 측면이 보다 크게 부각됐다. 특히 이러한 단절은 오랫동안 자본과 기술, 시장에서 일본 경제에 깊숙이 편입돼 있던 식민지 경제 구조의 붕괴로 나타났다. 대부분의 공장들은 주요 기술자의 일본으로의 귀국, 원료 부족, 경영 능력 부재 등으로 거의 가동이 중단된 상태였다. 그나마 가동되는 공장이라야 한국인이 소유하고 있던 경성방직, 동양방직, 조선견직과 함께 몇몇 보잘 것 없는 고무공장이나 성냥공장 등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이들 공장 역시 북한의 송전 중단과 조직적인 노조 파업 등 정치적, 사회적 혼란이 가중되면서 이내 가동이 멈춰서고 말았다.

한데도 감격에 겨운 해방은 잠시 이성을 잃어도 좋을 만큼 먹고 입을 게 넘쳐났다. 갑자기 항복을 선언하면서 미처 다 가져가지 못한 일본군 보급 창고에서 흘러나온 각종 군용식량과 피복류, 그리고 일본 산업체의 재고품 따위가 길거리로 무한정 쏟아져 나와 흥청거렸다.
더구나 해방이 되던 해에는 일찍이 볼 수 없었던 풍작이 든 데다, 일본으로 공출도 없었기 때문에 식량 공급이 넘쳐나기까지 했다. 엊그제만 하여도 만주산 좁쌀조차 없어 콩깻묵으로 주린 배를 채워야 했던 농촌은 모처럼 흰 쌀밥으로 배불리 먹을 수 있게 됐다. 집집마다 술까지 빚어 마셨다. 일제의 가혹한 수탈 속에 허리띠마저 졸라매야 했던 결핍을 어느새 까마득히 잊고 만 채 농촌과 도시 할 것 없이 그야말로 물 쓰듯이 한 것이다.

그러다 해를 넘기기 전에 도시에선 벌써 쌀 부족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쌀 배급소에서 나눠주는 배급량이 턱없이 줄어만 갔다. 5일치 분량이라고 나눠준 게 겨우 하루 먹고 나면 그만일 정도였다.

당시 신문은 식량 부족으로 굶주리고 있는 민중의 고통을 전했다. '일본 제국주의의 폭학도 능히 조선 민중에게 최소의 호구량을 보장할 수 있었나니 조선 해방의 은인이며 조선 독립의 원군인 미군정 당국이 어찌 이에 무관심할 수 있으랴…'하고 미군정청을 따갑게 비난하면서, 미곡의 수집과 배급을 미군정청이 아닌 민간인들에게 맡길 것을 주장하고 나섰다. 또 며칠 뒤 쌀을 달라고 시청 앞에 모여든 군중 가운데 부인 한 사람이 총에 맞아 부상당한 사건을 보도한 사회면에선 '쌀 대신에 총부리 응수, 어제 시청 앞에 유혈의 참극'이라는 제목을 달기까지 했다. 미군정청은 이 두 기사를 포함한 몇 건의 기사를 문제 삼아 '조선인민보'의 홍증식 사장과 김오성 편집국장을 군정 포고 위반 혐의로 구속해버렸다.
그러나 당시 '조선인민보' 등 신문의 보도는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었다. 그때 서울역을 이용하는 하루 승객 2만명 가운데 절반가량이 오로지 가족을 위해 호남 등 지방으로 쌀을 구하러 오가는 사람들이었다. 굶주린 군중들은 모리배 상인들이 목포에서 한강을 따라 운반해오는 쌀을 기다리고 있었으며, 쌀을 살 수 없는 남편이 아내와 아이들을 죽이고 자신도 자살한 사건까지 일어났다.

심지어는 미군정청 산하의 중앙방송국에 종사하고 있는 이들까지 식량 부족을 호소할 정도였다. 당시 '한성일보' 기사에 따르면 '쌀 기근의 소리는 서울방송국에까지!'라는 제목과 함께 '중앙방송국 기술진은 지금 받고 있는 급료로는 도저히 생활을 유지할 수 없어 마음 놓고 방송 업무에 종사할 수 없으니 급료를 인상하여 주거나 쌀을 매일 2홉씩 배급하여 달라고 총파업을 단행했다'고 쓰고 있다.

미군 감독관이 방송 개선안을 제출하라고 하자 서울방송국의 문제안 기자는 자신의 의견서를 제출하면서 방송국 직원들의 호구지책 문제도 함께 거론했다. '나는 크게 부르짖는다. 내 어머니에게 쌀을 달라! 그렇지 않으면 나에게 죽음을 달라! 쌀만 내 어머니에게 풍족히 준다면 나는 조선방송 사업을 위해서 내 목숨을 아끼지 않으리라!'

중앙방송국의 사정이 이러할진대, 다른 곳은 더 말할 나위조차 없었다. 당시 '전국노동자신문' 기사에 따르면 광화문체신국과 서대문체신국에서는 '쌀을 구하러 가기 때문에 결근이 매일 혹은 월요일마다 10명 내지 20명'이 나왔고, 서울중앙우편국의 경우 한 달에 40~60명의 결근자가 나왔다.

한편 이러한 쌀 부족 현상은 비단 우리만이 아닌 일본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그간 한 해 동안 조선에서 생산되는 쌀 총 생산량 1300만석 가운데 무려 1000만석 가까운 쌀을 강제 공출해 가면서 식량 문제를 해결해왔던 일본은 패망과 함께 쌀 공급선이 단절되면서 당장 식량 기근에 허덕였다. 때문에 일본은 미국을 움직여 한국에서 쌀을 수출케 하도록 압력을 넣었다. 그러면서 8만석 가량의 쌀이 한국에서 일본으로 공식 수출됐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턱없이 모자랐고, 이때가 기회라고 생각한 투기꾼들이 나서 작은 동력선을 이용해 쌀을 일본에 밀수출하기 시작했다. 일본인들은 쌀 밀수출을 크게 환영했다. 투기꾼들은 쌀을 일본에 넘겨주고 한국에서는 구하기 어렵다는 감귤에서부터 시멘트, 카바이드, 가성소다, 화장품, 의약품 등을 가져와 몇 배가 넘는 이윤을 남겼다. 비록 강제 공출 규모에는 미치지 않았더라도 해방 이후 밀무역으로 일본으로 다시금 쌀이 일부 빠져나가면서 쌀 부족 현상은 그만큼 더 심해졌다.

그런데다 갑자기 인구까지 크게 늘어났다. 해방 한 해 전인 1944년 남한의 인구는 약 1656만명이었다. 한데 1946년에는 약 1937만명으로, 2년 동안에 무려 280만명이나 증가했다. 자연 증가에 의한 성장도 일부 포함됐으나, 대부분의 경우 일제 강점기에 일본과 중국ㆍ러시아 등지로 나가있던 해외동포들이 속속 귀국한데 따른 것이었다. 여기에다 북한에서 남하한 사회적 이동까지 더해지면서 해방 이후 남한 인구는 순식간에 200만 이상이 증가했다.

갑작스런 인구 증가는 남한의 물자 부족을 더욱더 부추겼다. 해방과 함께 경제 활동이 거의 단절된 상태에서 결국 부족한 물자를 공급받을 수 있는 길이란 무역 밖에는 없었다. 이럴 때 불어 닥친 열풍이 중국을 상대로 한 정크(junk)무역이었다. 사실 정크무역이 언제 어떻게 시작됐는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해방 직후부터 중국의 정크선이 일부 서해 바다를 건너 인천을 드나들고 있었고, 그들은 주로 고추 마늘 한약재 옷감 등의 생활필수품을 싣고 들어와 마른 오징어나 건어물 인삼 등을 가지고 돌아갔다.

한데 해방 이듬해부터 갑작스레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중국의 정크선들이 점차 천진, 대련, 청도 등지에서 일본군 보급 창고나 일본 산업체의 창고를 털어 물자를 대량으로 싣고 들어오면서부터였다.

우리 쪽에서도 피차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물자 부족에 허덕이고 있는 터에 그들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정크무역은 이같이 처음에는 일본으로부터 약탈한 물건을 서로 물물 교환하는 방식이었다가 점차 상리를 노리는 물자 교환의 단계로까지 확대돼 나갔다.

상대국의 공식적인 허락 없이 이뤄지는 교역 활동은 일종의 밀무역이었다. 분명 단속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미군정청도 아편 등 일부 특별 관리 품목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제약을 가하지 않았다. 당시 미군정청 상무부에는 무역행정 고문으로 거윈 준위가 있었고, 인천항만사령부에는 상무부에서 파견나간 길버트 상사가 상주하고 있었다. 수출입에 관련한 사항은 거윈 준위의 서명 정도로 충분했으며, 정크선의 입출항ㆍ하역ㆍ선원들의 상륙에 대해서는 길버트 상사로부터 허가를 받아야 했으나 대부분 통과시켜 줬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해방 이듬해인 1946년에는 정크무역이 러시를 이뤘다. 한 해 동안에 무려 300여 척의 정크선이 인천항을 드나들 정도였다. 정크무역이 러시를 이루자 미군정청은 무역업자의 난립을 막기 위해 나섰다. 외국무역규칙 제1호를 공포해, 무역 면허제를 실시한 것이다. 하지만 무역 면허제는 자본금이나 실적 등에 대한 규제 없이 신청만 하면 누구에게나 교부해주는 형태였으며, 무역 면허증을 교부받은 무역업자는 총 528명에 달했다. 면허증 1호는 건설실업의 대표 김익균이었는데, 화신무역의 회장 박흥식은 무역 면허증 1호가 자신의 화신무역에게 주어지지 않았다고 항의하는 소동까지 벌였다.

그럴 만도 했던 게 정크무역이 시작되기 훨씬 이전부터 박흥식은 무역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터였다. 그는 일본인 도매상들이 단합해 종이를 공급해주지 않자 지구 반대편의 서전(스웨덴)에서 직수입해 들여와 손쉽게 돈방석에 앉은 뒤 불과 30살의 나이에 '상점의 왕'이라는 화신백화점의 사주가 되면서 일약 한인 상계의 총아로 떠오른 인물이었다. 박흥식이 자본금 275만원(지금 돈 약 3400억원)을 투자해 대규모 화신무역을 설립한 것은 1939년이었다. 덩치만 큰 것이 아니었다. 이때 이미 독일인과 일본인을 경영고문으로 위탁하고, 동남아는 물론 유럽과 아프리카에까지 진출해 있었다. 또한 대륙 시장을 개척하기 위해 중국 천진에 출장소를 두고 있을 정도였다.
해방 직후 이러한 밀무역은 결코 놓칠 수 없는 절호의 찬스였다. 따라서 서울 뿐만 아니라 전국에서 돈푼깨나 가졌다는 이들은 밀무역 거래에 기웃거렸다. 특히 패망한 일본으로부터 약탈한 물자를 밀거래하는 정크무역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다. 정크무역에 뛰어든 이라면 누구나 한몫 잡을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러나 해방 직후 인천 앞바다를 뜨겁게 달구었던 정크무역도 그리 오래 가지는 못했다. 정크선들로 잠시도 조용할 날이 없었던 인천 앞바다는 이내 횅하니 정적이 감돌았다. 우리 쪽에 무슨 사정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서해 바다를 건너오던 정크선들에 문제가 생겼다.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한때 성행했던 정크무역도 1947년 봄부터 서서히 자취를 감추기 시작한 것이다.

정크선이 실어온 밀무역이 됐든지 아니면 공식적인 허락을 받은 거래가 됐든지 간에, 해방 전후 무역은 유일하게 불황을 모르는 호황 업종이었다. 부의 지도를 본격적으로 나라 바깥에서 찾기 시작한 때기도 했다.

비록 일본의 3국 무역 단절로 뜻을 이루지는 못했으나 해방 직전 유한양행의 유일한은 동남아 진출을 적극적으로 꾀하고자 시도했다. 이화상점의 오계선은 만주에서 전쟁이 발발하기 이전에 베트남 쌀을 만주 군벌 장작림에게 군량미로 수출하는 기염을 토했다.

포항에서 철도화물 운송취급업을 하다 삼일상회를 설립한 김용주(훗날 전방그룹 회장)는 동해에서 정어리어업을 비롯해 수산ㆍ해운ㆍ무역업을 벌여 중국 천진과 상하이 등지에 수산물을 수출하면서 무역업계에 이름을 올렸다. 청진에서는 70여 척에 달하는 대형 선단을 이끌며 역시 정어리어업으로 재계에 등장한 설경동(대한전선그룹 회장)을 비롯해 전택보(조선일보ㆍ천우사 사장)와 조영일(대성산업 사장) 등이 곡물류와 수산물을 만주와 중국에 수출하면서 부의 지도를 해외로 넓혀나갔다.

해방 이후에도 초창기 무역업계는 한동안 이들이 주도해나갔다. 초창기 무역업계는 박흥식의 화신무역 다음으로 염익하의 금익통상과 김규면의 삼양무역 등이 한때 눈에 띄는 약진을 보였으나 오래 가지 못하고 점차 그 명성을 잃어갔다.

거래 실적만으로 보았을 땐 해방 직후 국내 무역업계 랭킹 1위는 박흥식도, 설경동도 아닌 삼흥실업이었다. 만주에서 무역업에 종사를 하다 해방 이후 돌아온 서선하, 오천석, 최태섭(한국유리공업 회장), 박창일 등이 합자해서 설립한 신생 무역회사였는데, 마카오ㆍ홍콩 등지에 수산물ㆍ광산물ㆍ돼지털 따위를 수출하고 생고무ㆍ펄프ㆍ면사ㆍ화공약품 등을 수입해 들여왔다.

수출 규모 면에선 계속해서 낯익은 이름이 자리를 지켜갔다. 무역 면허증 제1호를 따내면서 박흥식으로부터 항의 소동까지 받았던 김익균의 건설실업이 해방 이후에도 여전히 상위권을 형성한 것이다.

물론 신진 세력의 도전 또한 없지 않았다. 중앙산업(조성철), 동아약품무역(강중희), 한국물산공사(강석천), 삼성물산상회(김만복), 조선약업진흥(전용순), 동화산업(장기식), 영풍상사(최기호), 상호무역(주요한), 대동산업(김지태) 등이 새로이 이름을 올렸다. 뒤이어 대구에서 양조장을 경영하던 이병철이 상경하여 삼성물산공사를 설립하는가하면 개풍상사(이정림), 남선물산(김원규), 미진상사(이연재), 범아무역(설도식) 등이 가세하고 나섰다. 특히 이 가운데 동아상사(김인형)는 혜성처럼 나타나 도약을 거듭하면서 잠시 선두주자로 부상해 재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어쨌든 해방 직후 극심한 부침 속에서도 재계는 정크무역으로 재미를 보면서 저마다 해외 시장 개척에 눈길을 돌리게 됐다.

<박상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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