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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업성장史]⑦종로 거리의 두 거상, 백화점 공방은 시작되고···

최종수정 2012.02.29 11:00 기사입력 2012.02.29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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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박상하가 쓰는 재계 通史
-박흥식, 종이 판매회사로 거금 번 평안도 용강 땅부잣집 아들
-최남, 전대미문의 '정가 판매'라는 대담한 상술로 돈 만진 상인


20세기 초 상계에 새로이 등장하게 된 전통적인 땅 부자들 가운데는 지방의 소규모 지주 경영자들도 다수 포함돼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평안도 용강 출신의 박흥식이었다. 그의 집안은 10대째 내려오는 2000석지기 지주로 용강 땅에서 제일가는 부자였다.
그는 고향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16살 때 쌀장사를 시작하면서 상계에 뛰어들었다. 젊음을 내던져 기꺼이 도전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22살 때는 사업을 더욱 확장했다. 인쇄소와 함께 용강 철도역이 화물 집산지로 발달하자 몇몇 사람과 자본을 한데 모아 물류, 운송, 금융, 창고업을 겸하는 서선산업주식회사를 공동으로 설립했다.

2년이 더 지나자 이번에는 고향을 떠나기로 마음먹는다. 지난 8년여 동안 나름대로 경영수업을 충분히 쌓았다고 생각한 그는 좀 더 넓은 세상을 찾아 상경했다.
경성으로 올라온 박흥식은 지금의 을지로 2가인 황금정 2정목에 서양종이 도매상인 선일지물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조선에서 제일이라는 야심을 품고서 '선일(鮮一)'이라고 상호를 작명한 것이다. 박흥식이 설립한 이 종이 판매회사는 당시 경성 시내에서 문을 연 조선인 최초의 종이 도매상이었는데, 고향에서 인쇄소를 경영하면서 착안한 사업으로 보인다.

선일지물을 설립한 박흥식은 곧바로 경성 시내 조선인 종이 도매상과 인쇄업자 그리고 학교를 낀 문방구업자들을 상대로 선일지물을 알리는데 주력했다. 안내장을 발송하는 것은 물론 직접 명함을 돌고서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조선인이 경영하는 회사라며 민족 감정에 호소했다.

그 뿐 아니라 장사하는 방법에 있어서도 남다른 차별을 두었다. '한 푼이라도 값싸게 매입해서 한 푼이라도 값싸게 공급한다'는 선일지물만의 철칙을 지켜나갔다.

이런 경영전략은 보기 좋게 적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박흥식의 선일지물이 경성 시내 종이 소매업의 상당 부분을 점유케 됐다.

이쯤 되자 어느새 그는 조선의 상권을 수호하는 상계의 혜성으로 떠올랐고 항상 일본 경찰의 감시가 뒤따르기 시작했다. 아니 그보다 선일지물에 시장을 빼앗긴 일본인 도매상들이 그를 노골적으로 견제하고 나섰다.

박흥식이 어쩌다 거래처 손님들을 모시고 명월관이라도 가게 되면 출입을 막아버리는가 하면, '종이를 더 달라'고 주문을 해도 일본인 수입상은 '종이가 없다'는 핑계를 대며 물량까지 규제하고 나섰다. 박흥식과 거래하는 소매상과 인쇄업자들은 아우성을 쳤다. 하지만 당장 종이를 공급해줘야 할 선일지물의 창고 안은 번번이 바닥을 드러내기 일쑤였다.

일본인 도매상들이 박흥식을 견제하기 위해 일본인 수입상에게 자금 공세를 펼쳐 종이를 선매해버린 탓이었다. 아니면 그들과 별도의 판매 계약을 맺어 박흥식이 종이를 충분히 공급받지 못하도록 숨통을 조였던 것이다.

결국 무언가 극약 처방을 찾아내지 않고서는 도저히 난국을 헤쳐 나갈 수 없다고 판단한 그는 난생 처음으로 일본까지 건너가야 했다. 종이를 안정적으로 공급받기 위해서 일본의 왕자제지 본사를 직접 찾아가 담판을 벌이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현해탄을 건너 물어물어 찾아갔으나 문전박대만 받고 그냥 돌아서야 했다. 러일전쟁을 비롯해 제1차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일본 국내에서도 인쇄물이 폭증해 종이 수요가 날로 증가하고 있는 마당에 그가 내민 명함이 통할 까닭이 없었다.

그렇다고 빈손으로 그냥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며칠째 왕자제지 주위를 떠나지 못한 채 애만 태우고 있다가 아주 우연찮게 엿듣게 된 사소한 정보 하나가 그의 귀를 번쩍 뜨이게 했다.

종이는 일본만이 아니라 북유럽에서도 생산되고 있으며, 특히 서전(스웨덴)이 세계 최대 종이 생산 국가라는 얘기였다. 그런 정보를 엿들은 박흥식은 왕자제지에 더는 연연하지 않고 일본 바깥으로 눈을 돌리기로 했다.

곧바로 택시를 불러 타고서 도쿄 도심 한복판에 있다는 스웨덴 영사관으로 무턱대고 찾아갔다. 그런 다음 일본의 왕자제지보다 훨씬 더 저렴한 가격으로 스웨덴으로부터 종이를 직수입하는데 성공했다. 세상의 일이란 게 알고 보면 그토록 동전 뒤집기만큼이나 간단한 것이었다.

헌데 그렇게 어렵사리 종이를 확보해놓자 이번에는 거래처가 말썽을 부렸다. 관공서, 회사, 은행 등은 물론이고 일본인 지물상마저 서로 결탁해서 조선인 박흥식의 종이를 구입하지 않았다. 일본에서 들여온 종이보다 가격이 훨씬 더 저렴한데도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박흥식을 구한 것은 천운이었다. 그 무렵 조선왕조의 마지막 임금인 순종이 일본의 독살로 승하하고 만데 이어, 6ㆍ10만세 사건이 일어나자 정국은 그 어느 때보다 민족 감정으로 한껏 고조돼 있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그를 가장 먼저 불러준 이는 동아일보 사주 김성수였다. 동아일보가 궁지에 처한 박흥식을 돕겠다고 자청하며 나섰다. 그동안 일본인 도매상에서 구입해오던 막대한 신문 용지를 박흥식의 선일지물로 바꿔 구입하기로 약속한 것이다. 뒤이어 조선일보의 방응모도 가세하고 나섰다. 박흥식으로선 가만 앉아서 조선 최대의 종이 거래처를 한순간에 확보케 됐던 것이다.

이후 그는 순풍에 돛단 배였다. 막대한 종이 수입으로 돈방석에 앉게 되면서 이윽고 조선 상계의 메카랄 수 있는 종로 (지금의 2가)거리로의 진입을 시도하기에 이른다.

이때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이 종로 거리에서도 가장 화려하다는 화신상회였다. 소문난 귀금속 전문점이었던 화신상회는 장안의 고관대작들은 물론이고 남촌의 혼마치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조차 탄복해 단골로 드나들 정도였다. 이런 명성에 힘입어 화신상회는 기존의 귀금속점 말고도 양복점을 새로 들이고 다양한 고급 잡화까지 취급할 정도의 대형 잡화점으로 한창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그렇게 잘나가던 화신상회가 갑자기 주춤대기 시작한 건 1930년 남촌의 혼마치에 최초로 미쓰코시(지금의 신세계) 백화점이 들어서면서였다. 이 백화점에 북촌의 고관대작들과 돈 많은 부자들이 점차 드나들기 시작하면서 사정이 급변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미쓰코시백화점의 상품이 좋았다.
일제시대 서울 회현동에 있던 미쓰코시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 본점)

일제시대 서울 회현동에 있던 미쓰코시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 본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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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종로 거리의 화신상회에 불똥이 떨어졌다. 귀금속점, 양복점, 고급 잡화 등으로 한창 사업을 다각화하고 있던 화신상회에 갑자기 손님들의 발길이 줄기 시작한 것이다.

더구나 당시의 화신상회는 겉모양새가 형편없는 기와집 건물이었다. 3층 르네상스식 미쓰코시백화점의 겉모양새에 비교가 되지 않았다.

박흥식이 그런 화신상회를 인수하기 위해 봉투를 내밀었다. 일찍이 '풍요와 소비의 판타지, 상점의 왕'이라는 백화점을 남몰래 꿈꾸어 왔던 그가 인수전에 뛰어든 것이었다. 화신상회는 30만원(지금 돈 약 360억원) 미만으론 내놓지 않겠다고 단언했다. 박흥식이 내민 봉투 안에는 35만원(지금 돈 약 420억원)이 들어 있었다.

화신상회를 인수한 박흥식은 곧바로 기와집이던 낡은 건물부터 헐어냈다. 그런 뒤 혼마치의 미쓰코시백화점과 같은 높이의 3층 대형 건물을 산뜻하게 지어 올렸다. 일본 백화점을 상대로 선전포고를 한 셈이었다.

그러나 화신상회는 백화점이 아니었다. 엄밀히 말해 백화점이 아닌 대형 잡화점이었다. 그런 박흥식보다 한 발 앞서 조선 최초로 백화점을 세운 이는 정작 따로 있었다. 최남(崔楠)이었다.

최남은 고물 장사를 시작으로, 인사동 입구에 어렵사리 덕원상점을 열어 종로 상계에 진출한 이였다. 그리고 상운이 따랐다. 일제의 무력통치에 항거해 3ㆍ1운동이 일어나 반일 감정이 고조되면서 전통적인 조선 상계의 메카였던 종로 쪽으로 인파가 물려들게 된 것이다.

하지만 최남은 거저 주어진 상운에만 결코 기대지 않았다. 당시로선 획기적이라고 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는 '정가 판매'라는 대담한 상술로 큰돈을 벌어들였다.

하긴 당시만 해도 에누리 없는 장사가 없다고 일컫던 시절이다. 이 때문에 조금은 약삭빠르고 영악스럽고 떠벌리기 잘하고 사람 속여먹는 것이 곧 장사꾼의 전형처럼 여겨지던 때였다.

최남은 이런 악습에 과감히 승부수를 띄웠다. 그의 덕원상점은 때마침 밀려들기 시작한 손님들에게 '정가 판매' 실시로 안심시키는데 성공했다. 상품의 가격은 물론 정직하게 판다는 안내문을 따로 내걸기까지 한 것이다.

그 같이 떼돈을 벌게 된 최남은 이내 종로 거리에서 다섯 개의 상점을 소유하는 거상으로 부상했다. 종로 상계에 진출한지 불과 8년여 만에 거둔 기적 같은 성적이었다. 1931년 종로 화신상회 바로 옆 자리에 이른바 새 '삘딩'이 지어져 올라섰다. 민규식의 영보합명회사에서 짓기 시작한 지하 1층 지상 4층 높이의 현대식 건물이었다.

'풍요와 소비의 판타지, 상점의 왕'을 꿈꾸는 이는 비단 박흥식만이 아니었다. 최남 또한 진작부터 백화점에 대한 꿈을 품고 있었다.

그리해 민규식에게서 그 '삘딩'을 통째로 임대해 조선 상계 최초로 백화점을 개점했다. 혼마치의 일본 백화점에 비교해도 조금도 손색이 없는 200여 명의 점원들이 손님을 맞이한다는 '동아백화점'이 그것이었다.

물론 백화점을 갖고 싶다는 꿈은 비단 이 둘만이 아니었다. 크든 작든 간에 종로 거리에 상점을 가진 상인이라면 누구라도 한번쯤은 그런 생각을 해볼 만도 했다.

하지만 그들은 백화점 형태의 초대형 상점 경영은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해 도무지 엄두를 내지 못했다. 무엇보다 일본 상인들의 막대한 자본력에 맞상대가 될 수 없는데다 더군다나 일본에서 상품을 직접 들여올 수 없다는 뚜렷한 한계를 안고 있었다. 일본 상인들이 얼토당토않은 일수판매 제도를 만들어 조선 상인들은 일본 상인들의 도매점에서만 상품을 구입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런 환경 속에선 결코 가격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고 본 것이다.

그런 상황이지만 박흥식과 최남의 생각은 기발했다. 일본인을 자신의 대리로 내세워 일수판매 제도를 보기 좋게 뚫고 들어간 것이다.

실제로 최남은 혼마치 거리의 미쓰코시백화점을 수시로 드나들면서 일본인 점원 와타나베를 덕원상점의 지배인으로 끌어들였다. 그런 다음 와타나베를 통해 일본으로부터 직접 상품을 들여오면서 일본 상인들이 철옹성처럼 구축해 놓은 일수판매 제도를 간단히 따돌리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박흥식은 연일 울상이었다. 최남이 한 발 앞서 나가고 있는데도 자신이 제출해 놓은 백화점 허가가 총독부에서 좀처럼 나오질 않고 있었다.

박흥식은 자신에게 백화점 허가를 내주지 않는 건 순전히 미쓰코시, 조지야, 미나카이, 히라타 등 혼마치 거리의 일본 백화점들과 총독부가 협잡한 꼼수라고 생각했다. 화신상회 바로 옆 건물에 최남의 동아백화점을 허가해줌으로써 같은 조선인들 끼리 서로 경쟁토록 꾸며낸 흉계라고 확신했다. 또 그럴 때 박흥식의 평소 성격으로 미뤄 분명 동아백화점보다 우위를 점하려고 출혈 경영도 마다치 않을 것이고, 그러다보면 결국에는 혼마치의 일본 백화점들만 어부지리를 얻게 될 것이라는 보았다.
철필 창간호에 실린 화신상회 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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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박흥식의 이런 생각이 사실이었는지, 아니면 경쟁 심리에 빠진 자가당착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박흥식이 일본의 그런 덫에 걸려들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마치 비웃기라도 하듯 그는 전혀 다른 방법을 찾아 나섰다. 일본의 꼼수대로 휩쓸려들지 않고 자신이 의도한대로 물꼬를 돌려놓은 것이다.

그것은 곧 허가권을 쥔 총독부 대신 최남의 동아백화점에 눈길을 돌리는 거였다. 같은 민족끼리 피 흘리는 쟁탈전 없이 동아백화점의 최남으로부터 순순히 항복을 받아낸다는 전략이었다.

종로 거리에 두 개의 태양이 빛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세간의 이목 또한 박흥식의 화신상회와 최남의 동아백화점을 긴장된 눈길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최남의 수성이냐, 아니면 박흥식의 쟁탈이냐. 과연 종로 거리의 두 거상이 맞붙어 어느 쪽이 승자가 될지 벌써 불꽃 튀는 접전을 저마다 저울질하기에 바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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