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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하의 한국기업성장사]③종로 육의전의 마지막 후예 대창무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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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박상하가 쓰는 재계 通史
-일제시대, 시전상인 백윤수 첫 주식회사 설립
-광복 거치며 권력주위 맴돌다 이승만과 함께 사라져


1960년 4.19의거 장면. 일제시대 갑부였던 백낙승은 이승만 정권이 붕괴되기 직전 최후를 맞이했다.<출처: 국가기록원>

1960년 4.19의거 장면. 일제시대 갑부였던 백낙승은 이승만 정권이 붕괴되기 직전 최후를 맞이했다.<출처: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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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안팎으로부터 거센 도전과 함께 하루가 다르게 변화해 가는 상업 환경에 적응치 못하고, 20세기 벽두에 그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만 종로 육의전의 최후는 실로 허망한 것이었다. 국초 이래 무려 500여년 동안이나 조선 상계를 주름잡았던 그 수많은 시전 상인들은 새로운 상업 질서에 끝내 편입되지 못한 채 도성 안의 한복판이랄 수 있는 종로 네거리 일대에서 밀려나 지리멸렬 스러져갔다.
그러면서 종로 네거리로 집중돼 있던 한성의 상권은 손가락 사이로 새 나가버린 물처럼 사분오열 뿔뿔이 흩어졌다. 외어물전이 있던 서대문 바깥으로, 또 동대문과 남대문 인근으로, 심지어 일본 상인들이 새로운 시가지를 이루며 집단으로 거주하고 있는 진고개 일대 혼마치(지금의 충무로) 등지로 제각기 분산돼 빠져나갔다. 그렇게 빛을 잃고 만 종로 일대는 다시금 새로운 주역들이 나타나기만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무주공산이나 다를 것이 없게 됐다.

그러던 1911년 시사신보에 재미있는 신문 기사가 실렸다. 당시 조선에서 50만원(자금 돈 약 500억원) 이상을 소유한 자산가가 모두 32명으로 집계된 것이다. 물론 이들 대부분은 왕족 아니면 관료 출신의 한성 양반 계급, 일부 지방의 토호였다.

이희(李熹) 흥선대원군의 장남
이강(李堈) 고종의 아들인 의친왕
박영효(朴泳孝) 철종의 사위
이완용(李完用) 고관대작
이재완(李載完) 흥선대원군의 동생인 흥안군 이최응의 아들
송병준(宋秉畯) 친일단체 일진회 회장
민영휘(閔泳徽) 고관대작
민영달(閔泳達) 고관대작
김진섭(金鎭燮) 한성의 마포 거상
김여황(金麗煌) 경기도 개성 거상
강유승(姜裕承) 평안도 진남포 거상
백윤수(白潤洙) 한성의 종로 거상
<중략>
그런데 이 가운데 맨 끄트머리에 적바림하고 있는 백윤수라는 이름 석 자가 단연 눈길을 끌었다. 비디오 아티스트로 널리 알려져 있는 백남준의 조부인 그는 이미 전멸하고 만 종로 육의전에서 이때까지도 유일하게 살아남은 시전 상인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백윤수는 원래 종로 육의전에서 조상 대대로 견직물 시전을 경영해온 거상이었다. 그런 그가 일본의 전격적인 화폐 개혁의 고비를 힘겹게 넘어서며 1907년에는 전통적인 시전 상인의 모습에서 탈피한 기업 형태의 '백윤수상점'을 열었다. 이어 1916년에는 지금의 종로 2가 종각 건물 바로 뒤쪽에 '대창무역주식회사'를 설립하면서 종로 육의전의 마지막 후예가 여전히 건재하고 있음을 확인시켜 줬다.

이때 백윤수의 대창무역은 자본금 50만원(지금 돈 약 500억원)에 불입자본금(拂入資本金) 50만원 규모였다. 더욱이 남들보다 앞서 주식회사 체제를 갖췄을 뿐만 아니라 같은 시기에 설립된 민족자본 기업들 가운데서도 보기 드문 대기업이었다. 백윤수의 대창무역보다 3년 늦게 설립된 김성수ㆍ김연수 형제의 경성방직 규모가 자본금 100만원(지금 돈 약 1000억원)에 불입자본금 25만원(지금 돈 약 250억원)이었고, 백윤수와 함께 장안의 3대 상인 자본가로 불렸던 박승직상점(지금의 두산그룹)이 6만원(지금 돈 약 60억원) 수준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당시 백윤수의 재력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가늠해볼 수가 있다.

백윤수는 대창무역을 통해 청나라에서 각종 견직물을 수입해 들여왔다. 그리고 그의 사업은 한동안 순탄한 듯이 보였다.

하지만 1920년에 들자 조선총독부가 억압하고 나섰다. 청나라에서 견직물을 수입해 들여오지 못하도록 금지한 것이다. 이에 따라 대창무역은 단번에 경영난에 빠졌다. 백윤수는 이를 타개하고자 1924년에 '대창직물'을 설립해 직접 견직물 생산에 들어갔다.

당시 대창무역 청량리 공장에 설치된 직조기 대수는 모두 300대로, 당시 국내 최대 규모라던 일본 미쓰이물산의 조선방직 부산공장의 인견 견직기 대수 319대의 수준과 거의 맞먹는 대규모 공장이었다. 그만큼 백윤수는 정황 판단이 빨랐고 시류에 민첩하게 적응해 나갈 줄을 알았다.

그러나 종로 육의전의 마지막 후예였던 백윤수는 같은 해 그만 타계하고 말았다. 그는 슬하에 낙원, 낙중, 낙삼, 낙승 모두 4형제를 두었는데 먼저 장남 백낙원이 대물림했다. 하지만 그 역시 1930년대 말에 타개하면서 이번에는 막내아들인 백낙승이 후계자로 나섰다.

백낙승은 일본 메이지대학 법학과에서 근대교육을 받은 엘리트였다. 사업적인 두뇌도 뛰어났을 뿐더러, 정치적인 수완까지 탁월해 시대의 흐름을 정확히 꿰뚫어볼 줄 알았다.

태평양전쟁 중에 어떻게 뚫었는지는 몰라도 서슬 퍼런 일본 관동군 헌병대에 손을 뻗쳐 대창직물에서 사명을 바꾼 '태창직물'을 통해 만주로 포목을 밀수출할 수 있었다. 이때 태창직물의 상표는 일본의 국화인 벚꽃 속에 '태(泰)' 자를 써넣은 것이었는데, 일본의 마루베니나 이토추상사와 같은 대기업들도 백낙승의 태창직물을 거쳐야 만이 비로소 만주에 직물을 수출할 수가 있을 정도였다.

말하자면 일본의 대규모 상사들이 태창직물에 포목을 공급하면 이 포목에다 벚꽃 속에 '태'자 상표를 눌러 찍어 일본 관동군 헌병대의 호송 아래 만주로 밀수출한 것이었다. 백낙승의 태창직물은 이런 간 큰 포목 밀수로 막대한 돈을 벌어들였고 그 막대한 돈을 다시 일본 동양면화에 투자해 이 기업의 주식을 절반 가량이나 소유하게 됐다.

하지만 꼬리가 길면 언제인가는 반드시 밟히기 마련이다. 태평양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어느날 그동안 관동군 헌병대의 비호 아래 아이들 미끄럼타기 만큼이나 손쉬웠던 밀수출이 그만 일본군 감찰대에 적발당하면서 밀수 품목 전량이 법원에 압류당하는 위기에 처하고 말았다.
일제시대 종로 2가. 백윤수는 1916년 이곳에 대창무역을 설립했다.<출처: 다음 블로그>

일제시대 종로 2가. 백윤수는 1916년 이곳에 대창무역을 설립했다.<출처: 다음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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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낙승의 시운은 거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밀수 품목을 전량 압류당한 채 지루한 재판을 받던 도중에 예기치 않은(?) 8 ㆍ15 해방을 맞이하게 됐다.

압류당한 밀수 품목은 지금의 서울역 앞에 있던 조일창고 세 동에 나눠 고스란히 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압류된 물자는 밀수품인지 아닌지 미처 가릴 새도 없이 미 군정 법무관의 해제 명령에 따라 물주인 태창직물에 즉각 반환됐다.

더구나 해방 직후에는 포목이 없어서 못 팔 정도였기 때문에 곧 부르는 게 값이었다. 태창직물은 다시 한 번 거금을 손에 쥘 수 있었다.

거금을 손에 쥔 백낙승은 눈을 돌려 이번에는 정크무역에 나섰다. 종전이 됐으나 중국에서 미처 가져가지 못한 일본 군수품이나 상가의 창고를 중국 상인들이 털어 정크선에 싣고 인천항으로 들어와서는 다른 물자와 교환해가곤 했는데 사실상 하락될 수 없는 밀무역이었다. 백낙승은 초기부터 정크 무역에 뛰어들어 다시금 거대 무역상으로 변신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크무역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해방 직후 1년 남짓 반짝 기승을 부리다 슬그머니 자취를 감춰버리게 되자 그는 새로운 돈줄을 찾아 이번에는 정치에 눈을 돌렸다. 서슬 퍼런 일본 관동군 헌병대를 뚫었던 솜씨를 또다시 유감없이 발휘해 이번에는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이승만에게 접근했다.

그 무렵 이승만은 돈암장에서 마포장으로 새로운 거처를 옮기면서 정치자금이 절실하게 필요하던 때였다. 백낙승은 그런 이승만에게 접근해 정치 자금으로 거액인 70만원(지금 돈으로 약 30억원)을 헌납한데 이어 이후에도 매달 빠짐없이 상당액을 갖다 바쳤다.

마침내 이승만은 백낙승이 의도한 대로 대통령이 돼 경무대(지금의 청와대)로 들어갔다. 그러면서 이승만은 그동안 신세를 진 백낙승에게 은혜를 보답했다.

"백 사장, 그동안 도와줘 고마워. 내가 돈이 있으면 갚아야겠으나 나에게 먹고 살라고 준 것이 아니고 나라일 하라고 준 것이니 고맙게 받았어. 백 사장도 국리민복을 위해 일하면 도와주겠어."

경무대에서 오찬이 끝난 뒤 이승만은 백낙승에게 약속했다. 백낙승은 이 말을 듣고 눈물을 글썽이며 감격했다고 한다.

백낙승은 확실히 줄을 잘 선 셈이다. 무소불위의 정치권력을 잡았기 때문에 이후 반민특위(反民特委)에 구속되었다가도 이내 풀려날 수가 있었다,

뿐만 아니었다. 그는 일본의 귀속 재산이었던 고려방직공사 영등포공장을 이승만의 도움으로 인수받을 수 있었음은 물론 식산은행(지금의 산업은행)으로부터 무려 500만 달러까지 융자받을 수 있었다. 이밖에도 백낙승의 계열 기업인 대한문화선전이 전국의 홍삼 판매권을 인수받은데 이어 조선기계의 인수와 함께 일본에서 대량으로 기계를 들여와 태창방직을 보다 확장시킬 수 있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이승만의 비호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더구나 달러가 금보다도 더 귀하게 여겨지던 당시에 그래서 달러 얘기라면 대통령 이승만마저 벌벌 떨던 그 시절에도 백낙승은 외화를 아무런 부족함 없이 쓸 수 있었다. 자신과 맞수라고 볼 수 있는 상계의 별들이 정치권력으로부터 무상이 떨어져 가는데 비해 유독 그만은 정치권력과 더욱 끈끈히 밀착되면서 정부의 지원을 맘껏 끌어다 썼다.

백낙승은 이같이 풍부한 자금과 정권의 든든한 지원 엄호를 받아가며 기업의 영토를 줄기차게 넓혀 나갔다. 1948년 전후에는 태창방직을 모기업으로 태창공업, 태창직물, 해전직물, 대한문화선전, 조선기계 등 계열기업을 즐비하게 거느렸다. 그리하여 우리나라 최초로 '태창재벌'을 탄생시키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너무 지나치면 반드시 탈을 일으켜 다시금 균형을 잡아주는 것이 역사다. 그러나 그는 이미 맛에 길들여진 달콤한 정치바람을 좀처럼 끊지 못했다. 다시금 6 ㆍ25 한국전쟁 이후에는 파괴된 공장을 복구하면서 지나친 특혜를 받아 말썽을 일으키더니 이후에도 이른바 삼백 파동과 연계자금 등 불미스러운 사고사건이 터져 나올 때마다 그의 이름 석 자가 단골손님처럼 등장했다.

결국 1960년 4ㆍ19 학생의거가 일어나 이승만 정권이 붕괴되기 직전에 백낙승은 최후를 맞이하고 마는데 그의 장례식은 명성에 어울리지 않게 찾는 이가 없어 매우 쓸쓸하기만 했다. 500년 전통을 자랑하던 종로 육의전의 마지막 후예이자, 최초로 집단 기업과 거대 자본을 일궈낸 재벌 총수의 죽음으로 보기에는 너무도 보잘 것이 없었다고 한다.

백낙승은 타계하기 전에 자신의 아들인 백남일을 후계자로 삼았다. 또 어떻게든 태창재벌을 다시 일으켜보려고 안간힘을 다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권력의 바람을 타고서 떠오른 거대한 풍선은 그 바람이 빠져나가기가 무섭게 이내 추락하기 시작했다. 또 한번 추락하기 시작한 태창재벌은 백약이 무효일 만큼 돌이킬 수 없었다. 거칠게 휘몰아친 정치권력의 소용돌이 속에 너무 깊숙이 빠져 들어가 있어 끝내 헤어나기 어려웠다.

아니나 다를까. 태창재벌은 백낙승이 타계하고 말자 기다렸다는 듯이 경영 악화에 빠져들어 심한 몸살을 앓기 시작했고 이후 부정 축재 처리 과정에서 전 재산을 국가에 헌납하고 백남일 등은 일본으로 귀화하고 말았다. 할아버지 대부터 꾸준히 투자해 놓은 일본 동양면화의 주식이 그들의 마지막 안식처를 제공했던 것이다.

물론 태창방직은 곧이어 새 주인이 나타나 아주 큼직한 문패를 다시 내걸었다. 일본에서 개인 종합 소득세 순위 1, 2위를 3년 연속 차지해 일본 재계를 놀라게 만든 서갑호가 그 주인공이었다. 그는 1949년 시가 50억엔 규모의 주일 한국대사관 건물을 국가에 기증하면서 한국 재계마저 놀라게 만든 재일교포 기업가다.

서갑호가 1961년 육군 소장 박정희가 일으킨 5 ㆍ16 군사 쿠데타 이후 경영 위기에 빠져있는 태창방직을 인수하면서 화려하게 금의환향했다. 태창방직의 문패가 그렇게 바뀌면서, 조선왕조 건국 이래 500여 년 동안이나 조선 상계를 지켜왔던 종로 육의전의 마지막 후예마저 끝내 그 명맥이 끊어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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