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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플+]이승엽 "국내 복귀가 시원한 이유는..."(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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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플+]이승엽 "국내 복귀가 시원한 이유는..."(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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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투데이 이종길 기자]‘국민타자’가 돌아왔다.

이승엽이 8년간의 일본 프로야구 생활을 정리하고 4일 영구 귀국했다. 김포공항 게이트를 빠져나오는 얼굴은 내내 해맑았다. 이어진 소감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는 “아쉬움보다 시원하다”고 입을 열었다. 사실 이승엽은 일본생활을 더 이어갈 수 있었다. 지난해 12월 1년간 연봉 1억 5천만 엔을 받고 오릭스 유니폼을 입었지만 발표와 달리 유효기간이 2년이었던 까닭이다. 한국행은 보장된 연봉을 포기한 새로운 도전인 셈. 그가 미소를 지으며 국내 리그로 복귀하는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7일 반포 서래마을 인근 커피숍에서 이승엽을 만나 솔직한 심정을 들어봤다. 또 지난 8년간의 일본프로야구 생활을 함께 되돌아보며 잊지 못할 순간들을 복기해봤다.
다음은 이승엽과의 일문일답

스포츠투데이(이하 스투) 일본 진출 8년 만에 국내 복귀를 선언했다.

이승엽(이하 이) 귀국 당시처럼 아쉽다기보다 홀가분하다. 만족스런 성적을 남겼다면 더 좋았겠지만 긴 여행을 마쳤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가볍다. 이제는 국내 무대에서 최선을 다해야 할 때다. 설레면서도 조금 걱정이 된다.
스투 걱정되는 부분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성적에 대한 부담이다. 기대하는 팬들이 많다. 나 역시 얼마나 해낼 수 있을지 궁금할 정도다. 생각하는 만큼 기록이 나올지 걱정된다. 그래서 최선을 다해 2012시즌을 맞을 계획이다. 나 자신에 대해 더 냉정해지려고 노력하고 있다.

[사진=Getty Images/멀티비츠]

[사진=Getty Images/멀티비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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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투 언제부터 국내 복귀를 고려했나.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 건 몇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마음을 굳힌 건 올해 후반기부터고. 사실 지바롯데 시절에도 복귀에 대한 마음은 있었다. 돌아가면 어떤 그림이 그려질 지 떠올려본 적도 있다.

스투 망설였던 이유가 궁금하다.

그만한 사정이 있었다. 삼성으로만 돌아가야 했는데 안 좋은 소문이 있었다. 스스로 나아가야 할 길도 있었고. 이 같은 생각은 성적이 차츰 좋아지면서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그 뒤 몇 년 동안은 정말 야구에만 전념했다.

스투 복귀를 결심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있다면.

터닝 포인트는 없었다. 올 시즌을 치르며 무작정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국내 팬들의 뜨거운 열기도 느껴보고 싶었고. 솔직히 타지에서 더 이상 스트레스를 받고 싶지 않았다.

스투 어떤 점이 스트레스로 작용했나.

오로지 승리만을 향해 달리는 시스템이다. 신분이 외국인이라는 점도 그러했고. 구단에 승리를 안겨야 하는 위치에서 좀처럼 마음을 강하게 다잡지 못했다. 오늘 못해도 ‘내일 잘하면 되지’라고 생각해야 하는데 신분 탓에 그러기가 쉽지 않았다. 걸려있는 옵션도 적잖게 신경이 쓰였고. 나중에는 팀보다 개인 성적을 올리고 싶다는 이기적인 생각까지 생기더라. 오릭스 구단에 많이 미안한 건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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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투 그 미안함이 복귀를 결심한 결정적인 계기로 보인다.

그렇게 보이나(웃음). 이 같은 패턴이 반복되면 개인적으로도 발전할 여지가 없다. 이기적인 생각은 야구에 도움이 되지 않으니까. 되돌아보면 ‘나만 잘하면 되지’라는 생각이 컸던 것 같다. 경기를 치를수록 더 그랬다. 변해가는 나를 보며 오릭스에 필요 없는 존재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투 오릭스 선수들과는 꽤 친하게 지낸 것으로 알고 있다.

두루두루 잘 지냈다. 동료들에게 무척 고맙다. 시즌 뒤 송별회 겸 회식을 했는데 한 명도 빠짐없이 서운함을 드러냈다. 지바롯데 때도 그런 적은 없었다. 성적으로 보답했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해 너무 미안하다.

스투 올 시즌 부진에도 불구 122경기를 뛰었는데.

오릭스 구단은 내게 늘 똑같았다. 좋을 때나 안 좋을 때나 기회를 줬다. 그래서 보답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여느 때보다 강했던 것 같다.

스투 지난 5월 9일 2군행을 통보받기도 했다.

오카다 아키노부 감독이 “(타격감을 끌어올릴) 시간을 많이 줄 수 없다”며 “원하는 대로 풀 스윙하고 오거라”라고 당부했다. 당시 성적이 타율 1할4푼5리 1홈런 5타점이었다. 2군에 방치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는데 기대를 버리지 않았다는 점에 너무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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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투 국내 복귀 선언에 오카다 감독이 뭐라고 하던가.

끝까지 나를 존중해줬다. “왜 가려고 하느냐. 부담을 갖지 않아도 된다”며 “계속 함께 해보자”라고 했다. “야구 인생에서 의미 있는 1년을 겪었으니 더 잘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응원도 해줬다. 사실 오릭스 이적 전에도 그에게 은혜를 받은 적이 있다. 2006년 추천을 받아 올스타전 명단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고시엔구장에서 고맙다고 인사를 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스투 오카다 감독의 만류를 뿌리치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마지막 인사 때 “기대를 많이 해주셨는데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마음을 아셨는지 오카다 감독은 조용히 어깨를 두들겨주며 “아쉽다”라고 했다. (하늘을 바라보며)얼마나 가슴이 짠했는지 모른다.

스투 일본 생활을 마감하며 가장 아쉬운 점을 꼽는다면.

한일 통산 500홈런, 2000안타를 달성하지 못했다. 각각 17개와 30개가 부족하다. 부상만 없었다면 분명 해낼 수 있었을 것이다.

스투 그간 일본 생활에서 시달린 잔부상은 불운이었나. 부주의 때문이었나.

후자에 더 가깝다. 특유 고집으로 생긴 탈이 더 많았다.

스투 왼손 엄지 부상으로 타격에 적잖게 애를 먹었는데.

그 발단은 2005년 지바롯데 스프링캠프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4시즌 뒤 가진 식사 자리에서 바비 발렌타인 감독이 “내년에는 수비를 좀 해줬으면 좋겠다”며 “앞으로 좌익수를 맡아 달라”고 당부했다. “열심히 하겠다”고 말한 뒤 한국으로 돌아와 바로 외야 수비를 연습했다. 그런데 막상 찾은 스프링캠프에서 발렌타인 감독은 3주가 지나도 연습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스프링캠프 마지막 날 연습 종료 30분을 남겨놓고 무작정 글러브를 끼고 외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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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투 그때 부상을 당한건가.

그렇다. 경험이 없어 모든 타구를 잡으려고 한 것이 화근이 됐다. 담장 밖으로 넘어가는 공을 잡다 담장에 부딪혀 손을 접질렸는데 얼마나 세게 충돌했는지 고개까지 돌아가고 말았다. 교통사고를 당한 것만 같았다.

스투 그해 시범경기에 바로 투입되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었나.

그렇다. 손가락이 구부러지지 않았다. 결국 2군에서 시즌을 시작해야 했고 통증을 참고 뛰다 수술대에 오르게 됐다.

스투 무릎 부상의 발단은 조금 다른 것으로 알려졌는데.

요미우리 유니폼을 입고 나선 2006년 6월 11일 지바롯데와의 교류전에서 와타나베 슌스케의 슬라이더를 잡아당겨 홈런을 쳤는데 1루 주자 오제키 다쓰야가 3루 베이스를 밟지 않는 ‘누 공과’를 범해 안타로 기록되고 말았다. 그 뒤로 경기를 뛸 때마다 피해를 입는 것 같았다. 그리고 2006년 8월 9일 메이지진구구장에서 참았던 감정은 폭발하고 말았다.

스투 심판의 오심에 더그아웃의 간판을 찬 것이 부상으로 이어졌는데.

무사 2, 3루에서 좌익수 앞에 떨어지는 타구를 때렸는데 심판이 아웃을 선언했다. 그것은 안타가 분명했다. 비가 조금 내렸는데 공이 땅에 떨어질 때 물이 튀는 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다. 당시 좌익수였던 알렉스 라미레스도 안타였음을 스스로 인정했고. 하지만 코치스태프의 항의에도 판정은 바뀌지 않았다. 너무 화가 난 나머지 더그아웃의 광고판을 발로 3번 걷어찼다. 그런데 다음날 무릎이 조금씩 부어올랐다. 주사를 맞고 물도 뺐지만 소용이 없었다. 수술대에 오르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사진=Getty Images/멀티비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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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투 화를 다스렸다면 두 번의 부상을 모두 피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일본생활을 정리하며 아쉬움이 컸던 것 같다. 마음을 조금만 다잡았다면 성적은 분명 더 좋았을 것이다.

스투 일본 심판들로부터 부당한 판정을 많이 받았다고 생각하나.

그렇진 않다. 작은 것에 불만을 가지면 불신만 가득해지게 된다. 리그에 임하는 자세도 삐뚤어지게 되고. 어느 나라에서든 경기에 임하는 자세는 늘 같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오해의 소지는 있다. 일본의 스트라이크존은 일관성이 없다. 어떤 심판이냐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외국인으로서 그걸 파악하는 데 많은 애를 먹었다. 일본 진출을 앞둔 이대호에게 이 점을 주의하라고 당부하고 싶다.

스투 일본에서 8년을 뛴 비결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TV 중계권 아니겠나(웃음). 국내 방송사들이 계약을 해준 덕에 실력에 비해 오래 뛸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큰 사고를 저지른 적도 없었고.

스투 일본에서 생활하는 동안 숱한 루머에 시달렸는데.

루머에 신경을 기울이면 야구를 할 수 없다. 그 정도는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다. 국내 네티즌들의 악성댓글로 이미 단련도 돼 있던 상태였고(웃음). 사실 처음 일본 매체에서 허위기사가 나왔을 때만 해도 무척 괴로웠다. 너무 화가 나서 구단 프런트에 항의를 하기도 했다. 특히 ‘석간후지’의 허위 보도는 참기 힘들 정도였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런 보도를 즐기게 됐다. ‘이승엽’이라는 사람을 주제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이 재밌게 느껴지더라. 나와 관련된 기사에 달리는 악성 댓글도 다르지 않다. 가끔씩 네티즌의 눈으로 나 자신을 되돌아보는데 질책에 스스로 고개를 끄덕일 때가 있다. 편하게 마음을 먹은 덕인지 이제는 상처를 거의 받지 않는다. 99개의 악성댓글 속에서 1개의 당근 댓글을 찾기 위해 인터넷을 뒤적거린 적도 있다(웃음).

도쿄돔의 기둥 겉 면을 장식했던 이승엽(사진=김성훈)

도쿄돔의 기둥 겉 면을 장식했던 이승엽(사진=김성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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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투 5년 동안 뛴 요미우리는 어떤 곳이었나.

선수라면 한 번쯤 경험해볼만한 구단이다. 좋은 성적을 내는 선수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만들어준다. 부진할 경우에는 말할 수 없을 정도의 고통을 안겨주고. 요미우리 유니폼을 입고 야구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많이 만들었다. 비참한 기억도 적지 않지만 나 자신에게 소중한 경험을 안겨준 구단이라고 생각한다.

스투 부상으로 부진했을 때 일본 매체들로부터 적잖은 비난에 시달렸는데.

내성이 생겨 크게 개의치 않았다. 잘해도 욕을 먹는 것이 선수다. 삼성에서 뛸 때 팬들로부터 “홈런 좀 그만치고 양준혁처럼 팀 배팅 좀 해라”라는 잔소리를 많이 들었다. 진루타를 때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타격 스타일에 변화를 주고 싶진 않았다. 그 때부터 웬만한 팬들의 성화에는 꿈쩍도 하지 않은 것 같다. 물론 괴로울 때도 있었다. ‘국민타자’라는 칭호에 따른 부담이 특히 그러했다. 팬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을 때 쏟아지는 비난을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했다. 그들의 기대와 사랑을 저버린 건 분명한 내 책임이니까.

스투 일본 진출 고려 당시 미국 메이저리그 구단들의 러브콜을 받았다. 8년이 흐른 지금 선택을 후회하지 않나.

여기서 한 가지 오해를 꼭 풀고 싶다. 일본 진출 기자회견 당시 (김)제동이 형과 내가 눈물을 흘렸는데 많은 사람들이 메이저리그에 진출하지 못한 아쉬움으로 알고 있다. 분명하게 말하지만 이는 소문과 다르다. ‘9년간 가족같이 대해준 삼성에게 고맙다’는 구절을 읽다 대구를 떠난다는 생각이 들어 감정이 북받쳐 올랐을 뿐이다. 2003년까지 전지훈련, 원정경기를 제외하고는 한 번도 대구를 떠난 적이 없었다. 삼성으로 돌아오지 못할 것 같은데다 여러 가지 생각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쳐 지나가면서 자연스럽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삼성과 대구에 대한 애착이었을 뿐, 메이저리그에 대한 아쉬움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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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투 메이저리그 구단들의 제의를 마다했던 이유가 무엇인가.

구단들이 제안했던 금액이 내 예상치보다 낮았다. 마이너리그 계약을 원하는 구단도 있었고. 지바롯데 입단은 다시 생각해도 올바른 선택이었다.

스투 메이저리그 진출 여부는 2006년 요미우리와 4년 재계약을 체결했을 당시 또 한 번 화두로 떠올랐는데.

미국행 비행기에 오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요미우리에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고 1년만 뛰고 떠났다는 이미지를 남기고 싶지 않았다. 좋은 성적으로 구단의 배려에 보답하고 싶었다. 당시 에이전트가 대화를 할 때마다 무척 답답해했다. “좋은 조건을 많이 제시받았는데 잔류 의사가 왜 이렇게 완강하냐”며 화를 내기도 했다. 물론 지금도 당시 선택은 후회하지 않는다.

스투 팬들의 뇌리에 강한 인상을 심은 건 아무래도 태극마크를 달고 뛴 2008 베이징올림픽이나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의 승부사적인 모습일 것 같다.

나 역시 2008 베이징올림픽에서 따낸 금메달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다. 일본과의 준결승에 나서기 전까지 성적은 22타수 3안타 타율 1할3푼6리에 머물렀다. 막판 홈런 두 방을 때리고 영웅 대접을 독차지한 것 같아 후배들에게 너무 미안했다.

이승엽과 고 장효조 삼성 2군 감독(사진=삼성 라이온즈 제공)

이승엽과 고 장효조 삼성 2군 감독(사진=삼성 라이온즈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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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투 당시 금메달을 딴 소감을 밝히며 눈물을 보였는데.

그럴 생각은 없었다. 너무 기분이 좋았으니까. 그런데 옆에서 누가 계속 울더라. 나도 모르게 감정에 북받치고 말았다. 원래 감수성이 강한 편이다.

스투 준결승전 전까지 부진을 거듭했다. 기분이 어떠했나.

미치는 줄 알았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나 때문에 군 복무를 받고 있을 후배들을 상상하니 눈앞이 캄캄했다. 벤치에서 얼마나 눈치가 보였는지 모른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도 한계가 있더라. 나중에는 애써 하늘을 바라보며 몰래 신세를 한탄했다.

스투 그러한 상황에서도 극적인 홈런의 주인공이 됐는데.

내가 친 게 아니었다. 하늘이 도와준 홈런이었다. 아버지도 그렇게 말했다. “네 힘이 아니라 조상님이 살펴준 덕에 친 것”이라고. 당시 홈런을 생각하면 난 천운을 타고난 것 같다. 솔직히 부진을 거듭했을 때만 해도 끝까지 믿고 기용해준 김경문 감독이 원망스러웠다. 교체해줬으면 하는 눈빛을 매번 애써 피하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그러셨던 것 같다.

스투 지바롯데 시절 전담코치였던 김성근 감독의 인연도 빼놓을 수 없는데.

동네 아저씨처럼 편하지만 야구장에서만큼은 무서운 분이다. 훈련을 하러 가기 두려웠을 정도다. 김 감독님은 늘 많은 연습을 요구했다. 전날 홈런을 쳐도 다르지 않았다. 개인적인 약속이 잡혀 훈련을 한 번 빠지겠다고 부탁한 적이 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는지 아나.

스투 어떻게 되었나.

배트를 200번 휘두르고 난 뒤에야 약속장소로 출발할 수 있었다. 김 감독님은 ‘예외’라는 단어를 모르시는 분이다. 훈련이나 경기에 있어 타협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당시의 땀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단언컨대 혹독한 연습은 정신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돌아갈 곳이 있다고 생각하지 마라’라는 말을 아직도 가슴 속 깊이 간직하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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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투 한국으로 돌아온 지 일주일이 채 되지 않았다. 앞으로 어떻게 지낼 계획인가.

자녀들 진학 문제를 해결하느라 정신이 없다. 내일은 병원에서 건강검진도 받아야 하고. 개인적인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하면 지인들을 찾아다니며 인사를 드릴 생각이다. 조만간 삼성 구단과도 복귀 협상 자리를 가질 계획이고.

스투 바쁜 일정을 소화해야 하는 탓에 가족들에게 많이 미안할 것 같다.

물론이다. 매일 경기를 뛰다보니 함께 추억을 만들 시간이 없었다. 일본이다 보니 마땅히 여행을 갈 곳도 없었고. 결혼 10년차인데 야구를 한 것 외에 특별한 기억이 없다. 잘 해주고 싶어도 잘 안 됐던 게 늘 미안하다.

스투 국내 복귀로 만회할 수 있는 기회를 맞은 것 같은데.

11월 말에 가족들과 미국으로 여행을 다녀올 예정이다. 스트레스도 풀고 좋은 추억도 많이 만들고 싶다. 한국으로 돌아온 만큼 아빠 역할을 더 많이 해낼 생각이다. 어제도 큰 애와 놀이터에서 축구를 하고 샤워를 함께 했다. 아이들의 즐거워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얼마나 뿌듯한지 모른다. 이제는 아내와 아이들을 위해 헌신하는 ‘국민 아빠’가 되고 싶다. 야구장에서처럼 꾸준히 노력하면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웃음).




스포츠투데이 이종길 기자 leemean@
스포츠투데이 정재훈 사진기자 roz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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