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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잣나무골편지]세탁기(?) 가 남편을 마초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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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이규성 기자]요즘 들어 아내가 세탁기를 새로 구입하자고 자주 보챈다. 자꾸 덜컹거리고, 빨래도 잘 안 되는 것 같다고...

벌써 이십여전이다.우리 부부는 결혼한 지 두달쯤 지나서야 '세탁기'를 샀다. "두 사람 사는데 세탁기가 필요하겠느냐. 손빨래를 하라"는게 내 의견였다.당시 세탁기시장에서는 대우 탱크세탁기와 삼성전자의 '사랑이라는 이름의 히트'세탁기가 각축을 벌였다.'탱크세탁기'를 선택하고 싶은 내 의견과 달리 아내는 사랑세탁기를 구입하고 싶어 했다. 계란도 삶아먹을 수 있을 정도로 뜨거운 물이 나오는 사랑세탁기는 당시 톱 여배우가 모델로 나와 한창 주부들의 맘을 사로잡았다.
반면 탱크 세탁기는 전자회사 사장이 직접 모델로 나와 "기술은 간단하고 힘이 좋다"나 뭐라나..홍보에 열을 올렸다. 결국 탱크세탁기를 구입했고 지금도 여전히 사용하고 있다. 탱크세탁기가 사랑세탁기보다는 더 마초스러운데 끌린 탓일까 ? 나는 한동안 아내로부터 '사랑이 전혀 없는 남편'으로 찍혀 곤욕을 치뤘다.

그런데 세탁기를 사고 나서 생각해보니 억울한 게 많았다. 신혼의 아내는 직장에 안 나갔다. 그런 아내에겐 빨래는 세탁기가 해주고, 밥은 밥솥이 해주고. 또 냉장고며 청소기 등 가사도우미들이 여럿이니 말이다. 낮 동안 한가롭게 보낼 아내가 부럽기도 했다.물론 남편인 당신도 보일러 덕분에 땔감을 구하거나 장작 패는 일이 없어졌지 않느냐고 따진다면 할 말은 없다.

석삼년 도시 생활을 하다가 주거를 전원으로 옮긴 다음 난 아내에게 몇가지 주문을 했다.
"나는 집을 지었고, 이제는 텃밭에서 우리가 먹을 채소 정도는 내손으로 생산을 하니 당신도 옷이나 그릇 정도는 직접 만들어야지 않겠어 ? 세탁기, 냉장고, 청소기 등도 있는데...무엇 좀 하는게 어때 ?"
처음 아내는 내 권유(압박)를 받아들이는 듯 했다. 군청 문화회관에서 진행하는 '강좌'도 듣고, 그릇이나 옷 제작을 배웠다. 그래서 커다란 도자기 쟁반 몇점과 원피스를 만들어 입기도 했다. 그런데 실제 만들어쓰는 것이 구입해 쓰는 것보다 비용도 더 들었다.우리는 금방 결론을 낼 수밖에 없었다.

'시간 잃고, 돈 더 들고... '에이 ! 이럴 바에는 그냥 사서 쓰자.'

우리는 자급자족하는 생활을 곧 포기했다. 분업화ㆍ전문화된 세상에서 통합적인 가정경제를 꾸린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문제다. 다른 문제도 있다. 아내는 아이들이 유치원에 가자 일을 하겠다고 나섰다. 생활에 필요한 물품을 외부에서 지원받고 대신 돈을 지불해야 하니 당연해 보였다. 쓸 데는 많고, 아이들은 커가니 한푼이라도 벌어야하지 않는가 ? 물론 대부분의 아내들이 그러할 것이다.

한번쯤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세탁기나 냉장고, 청소기, 전기 밥솥 등이 아내들을 밖으로 내몰았을거라는...세탁기가 없다면 우리 아내들이 집을 돌아올 수도 있을거라는...'

이건 분명히 틀린 생각이다. 아내들이 일하는데는 여성들의 자아 실현이 주된 이유지만 실상은 경제적 결핍도 가장 큰 이유다.게다가 아내들의 노동력까지 동원해야 할 정도로 각박한 우리의 생산성, 사회 구조 등도 원인이다.

지금 수많은 아내들이 일터로 가고 있다. 여성 취업자 991만명. 전체 노동인구의 42%를 차지한다. 아직은 남자들이 고급직종을 차지하고 있지만 언젠가 그녀들은 우리의 일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여성 인력의 39%인 315만명이 서비스ㆍ판매업에 몰려 있다. 즉 식당이나 옷가게 등에 있는 셈이다. 집에서 옷을 지을 아내들이 옷가게에서 옷을 팔거나, 밥 지을 시간에 식당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밥을 차려주고 있다. 이제 아내들은 한 가족의 아내만이 아닌 셈이다.

나 또한 다른 아내들이 차려주는 밥을 더 많이 먹으며, 다른 아내들이 만들고 파는 옷을 입고 있다. 지금 아내들은 가사를 대신해 빨래해줄 세탁기나 밥솥을 살 돈을 벌기 위해 일터로 나왔다.혹은 빨래해줄 세탁기가 있으니 가사에 바칠 시간이 줄어 밖으로 나왔을 수도 있다.달리 말하자면 세탁기는 아내들의 가사 해방을 도운 반면 세상에 대한 의존성을 키웠다. 어쨌든 아내들이 점점 더 몰려오고 있다.

그 대신 출산이나 육아는 하지 않는다. 물론 이상한 출산책이 있기는 하다. 아내들을 약 올리는 것에 불과하지만, 세자녀 가구에 아파트 특별공급을 실시한다든지 하는 것이 그렇다. '애를 셋 낳을 경우 출산 장려비를 준다'든지 하는 각종 장려책 등 여러가지 사탕발림도 꽤 많다. 애 많이 낳는 아내들에게 주는 일종의 성과급인 양...

세상은 아내들에게 애 낳기를 강요하고, 아내들은 일하겠다고 나서면서 큰 충돌이 벌어진 것이다. 그 틈새에 남편들이 끼어있는 것처럼 보인다.

가령 아내들이 집에 없으니 남편들이 집으로 들어가는 일이 많아지고 있다.
독일에서도 육아휴직을 내는 아버지들의 수가 2006년 4분기 3.5%에서 2007년 4분기 12.4%로 일년새 네배나 늘었다.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남편들의 육아휴직이 점차 늘고 있는 추세다. 일상에서도 비슷한 일들이 많이 벌어지고 있다. 가령 우리가 막 사회생활을 시작할 무렵 야근하는 아내를 대신해 유치원에 있는 아이를 데리러 가는 남편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주 흔한 풍경이다.

회식 도중에 일어서는 후배들의 모습을 보면 '세상이 변했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최근 여성가족부는 '2차 여성인력개발 종합계획'을 수립, 오는 2015년까지 여성경제활동 참가율을 55%로 끌어들일 계획이다. 또한 육아문제 해결을 위해 근무시간 단축 및 유연근로제를 실시할 작정이다.

여기에 더 많은 파트 근무, 근무시간의 개정, 탄력적인 출퇴근, 더 적은 노동시간...등등 쏟아지는 정책 모두 구호로만 들린다. 지금의 노동현실도 정말로 여성들이 원하는 환경을 만들어줄 지는 의문이다. 비정규직의 확대, 고용의 불안정, 노후 불안 등을 해소하지 않은 채 우리 사회가 여성들에게 융통성을 발휘할 지도 미지수다.

그런 의문이 사라지기 전까지 나는 아내가 집을 나서지 않길 바란다. 그리고 아내가 더 오랫동안 낡은 세탁기를 썼으면 좋겠다.




이규성 기자 pe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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