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한국에서 오신 김명주 씨세요?"
"네, 맞는데요? 누구신지…."
교환학생으로 바르샤바 대학교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어느 날 낯선 여자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언뜻 봐도 170cm가 넘는 훤칠한 키에 금발, 파란 눈을 지닌 이 폴란드 여자는 무척이나 반가운 듯 생글생글 웃으며 나에게 친근함을 표시했다. 낯선 사람의 수상한(?) 접근에 처음엔 경계심이 발동했지만, 예쁜 서양 여자가 한국말을 유창하게 구사하는 모습을 보고는 이내 경계심은 호기심으로 바뀌었다.
그녀와의 만남이 잦아지면서 한국어를 전공하게 된 이유가 궁금해졌다. 레나의 대답은 명쾌했다. "한국 게임과 만화가 너무 좋아서 한국이 좋아졌고, 한국어를 전공하게 됐다"는 게 그녀의 설명이다. 내가 눈을 반짝거리며 그녀를 응시하자, 다시 말을 잇는다.
"명주가 아직 모르는가 보구나? 폴란드에도 리니지, 라그나로크 같은 한국 게임 즐기는 사람이 많아!" 일본이나 중국처럼 같은 문화권의 인접 국가도 아닌, 지구 반대편 폴란드에 한국 게임을 즐기는 유저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내겐 흥미로웠다. 레나가 이어 "한국의 게임과 문화를 즐기는 사람들 대부분이 한국 문화를 아끼고, 사랑하는 한국의 광팬"이라고 말했을 땐 움찔했다.
레나의 말은 사실이다. 삼성전자와 LG전자 등 한국 기업들이 속속 폴란드에 입성한 뒤 이곳 사람들의 한국에 대한 관심은 부쩍 늘었다. 이들의 관심은 월드컵 개최국, 분단국에 대한 단순 호기심 수준에 그치지 않는다. 인터넷을 통해 한국을 알아가고, 한국 게임과 만화를 즐기면서 한국을 몸으로 익힌다. 바르샤바 대학교 등 몇몇 폴란드 대학은 이 같은 기류를 반영, 한국어과를 개설했다.
레나는 두 달 뒤 서강대학교 게임교육원으로 유학을 가 한국 게임에 대해 더 공부할 예정이라고 했다. 레나의 꿈은 리니지를 만든 엔씨소프트에 취업해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하는 것. 그녀가 살짝 꺼내 보여준 일러스트 작화 실력은 전문가 못지않았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그녀의 남친(남자친구)도 한국 사람이다.
오늘도 난 강의실에 들어가기 전, 한번 더 단정하게 옷매무새를 가다듬는다. 한국에서 온 유학생이라는 신분만으로도 다른 학생들에게 주목받기 때문이다. 학교 안에선 한국말로 "안녕"이라며 인사를 건네는 폴란드 학생들도 여럿 있다. 이럴 때면 나도 모르게 어깨가 으쓱해지고, 기분이 좋아진다. 연고 하나 없는 폴란드에서의 유학생활이지만, 가슴을 쫙 펴고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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