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가족상봉 이모저모
◆ 61년만에 왔는데 그리던 부인 못 만나= "네가 하준이냐? 어머니는?" "어머니는 아파서 못 왔습니다."
백발로 나타난 아들을 앞에 두고 89세의 석찬익씨는 아들을 만난 기쁨보다 부인을 못 만난 아쉬움과 미안함에 한참 말을 잇지 못했다. 아내 정태연을 만날 생각에 그 세월을 참고 기다렸는데 허리를 크게 다쳐 오지 못했다는 것이다.
황해도에 살던 석씨는 전쟁전인 1948년 스무살 아내에게 네살배기 아들을 맡겨둔 채 혼자 월남했고, 그 뒤 배가 끊겨 생이별해야 했다. 석씨는 부인과 아들을 기다리다 전쟁이 끝난 뒤 결국 재혼했다.
북녘의 부인에게 끼워주려고 준비한 금반지는 아들과 함께 온 손자 광일(35)씨를 통해 전달키로 했다.
"할아버지 보고 싶은 심정은 할머니가 더 큽니다. 할아버지보다 할머니가 더 늙었습니다. 마음 고생이 많았습니다. 왜 이제야 오셨습니까."
손자의 말에 석씨는 연방 고개만 주억였다. "61년만에 오는데 기대했었다고, 적십자에서 연락이 왔잖아 살아있다고, 그래서 기대했는데..."라며 석씨는 못내 안타까워했다.
"옛날 생각이 나는데 하도 오래 돼서 정신이 무뎌졌나보오"라며 성씨는 먹먹해 했다.
성씨는 6.25전쟁이 발발한 뒤 황해도 집을 나와 해안가로 잠시 피신했던 것이 영영 가족과 이별이 됐다. 1950년 초에 낳은 딸은 이름도 지어주지 못한 상태였다.
이번에 만나면 얼마나 고생했는지, 어떻게 지냈는지 묻고 싶었으나 첫 단체상봉에서는 북측 안내요원들의 눈길 속에 마음 열고 대화를 하기 어려웠다.
"어머니가 80세가 되도록 혼자 나랑 살았어요. 작년부터 잘 못 들어요."
고생했다는 말조차 차마 하지 못한 성씨는 아내의 이마에 있는 점이 기억난다는 듯 가만히 그 점에 손을 대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부인 만삭상태 사망 소식에 통곡= "내가 나올 때 어머니가 임신한 상태였는데. 어떻게 됐니?" "전쟁중에 폭격으로 숨졌어요."
60년만에 북측의 딸 경애(60)씨를 만난 이동운씨는 부인이 만삭인 채 숨졌다는 말에 참았던 눈물을 펑펑 쏟아냈다.
38선 이남지역이었지만 전쟁으로 이북으로 넘어간 황해도 연백군 용도면 고향에 남겨둔 부인이었다.
1년에 쌀 400∼500가마의 소출이 있을 정도로 소지주였던 이씨는 1.4후퇴 때 홀로 배를 탔다. 다리가 끊기면서 만선이 된 배에 가족이 모두 탈 수 없었고, 더구나 만삭이었던 아내는 거동이 불편했기 때문.
사위 장기준(63)씨가 꺼내든 빛바랜 부인 사진에 이씨의 통곡은 더해졌다. 동생 5명이 이미 저 세상 사람이라는 소식에 한 번 더 억장이 무너지는 표정이었다. 60년의 생이별과 하루벌이 노동자로 살았던 험난했던 삶이 스쳐가는 듯했다.
'얌전'이라고 불렀던 딸 경애씨는 그 때 두 살이었다. 이씨는 "자나깨나 너 생각뿐이었는데 이렇게 만날지는 꿈에도 몰랐다"면서 딸의 손을 잡고 놓을 줄 몰랐다.
얼굴도 기억하지 못하는 아버지의 손을 잡은 딸도 "아버지"를 연거푸 부르면서 눈물을 참지 못했다.
금강산=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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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준 기자 hjunpark@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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