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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민의 사이언스 빌리지] 영화 '두 교황'과 '지구 나이' 大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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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온도 '캘빈' 체계 정립한 英톰슨, 19세기에 지구나이 1억년 주장
자신의 가설과 배치되는 주장은 묵살·수십 년간 왜곡된 지식 퍼뜨려
1900년대 중반 방사능 활용한 계산법으로 지구 나이 46억년 밝혀져

김병민 과학저술가

김병민 과학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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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사과가 아니라 치유를 받아야 한다.


'정말 2020년이 왔구나!'

수십 년 전 2020년을 그린 영화 대부분은 암울한 시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고도의 과학기술과 산업문명을 배경으로 윤리와 인간 존엄이 상실되고 자본주의의 한계로 인류 대다수가 고통받는 시대입니다.


영화와 달리 지금 인류는 태양계 행성을 자유롭게 오가지 않습니다. 하지만 폭발적으로 진보한 과학기술과 산업문명의 혜택을 받는 동시에 기후 위기와 생태계 위협이라는 중대한 현실 문제도 맞닥뜨리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물론 세계 각국은 팽팽한 이념 대립과 견제로 힘의 균형을 맞추고 있습니다. 때로는 전쟁 혹은 자본주의의 양극화에 따른 가난으로 많은 인류가 고통받는 현실은 영화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런 대립과 조화가 투영된 듯한 숫자인 '2020'으로 시작하는 새해 첫 주말에 본 영화는 다른 여운을 남기더군요.

필자가 본 영화 '두 교황'(2019)은 실존 인물인 베네딕토 16세 전 교황과 프란치스코 현 교황의 논쟁을 그린 작품입니다. 영화에서는 처음부터 낡은 것과 새 것의 대립이 드러납니다. 가톨릭 교회에서 여러 문제가 있는 정통 교조주의를 계승하려는 자와 신자유주의 가치관을 지닌 것 같은 도전자의 대결 구도로 시작하죠.


영화 내내 엄밀하고 긴장된 논쟁이 벌어집니다. 하지만 프란치스코 교황은 상대의 마음에 귀를 열고 가슴으로 이해하며, 가톨릭 교회의 부정을 인정하고 베네딕토 16세의 반성도 이끌어냅니다.


왜 사람들이 '두 교황'에서 위안을 얻었는지 알겠더군요. 서로의 허물에 대해 인정하고 올바른 선택과 변화의 차원에서 주장을 수렴해 가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입니다.


사실 이런 대결 구도는 현대 종교와 과학의 논쟁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특히 '두 교황'의 주인공이 빅뱅과 진화론 같은 과학적 사실을 인정하며 정통 가톨릭의 두텁고 낡은 옷마저 벗어버린 탓인지 영화 내내 과학사의 유명한 대논쟁이 필자의 머릿속에서 겹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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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지구의 나이가 심심치 않게 논쟁의 중심에 서곤 합니다. 그러나 예전에는 더 그랬습니다. 15세기 르네상스의 여파로 종교에 의해 소멸했던 과학과 철학이 부활합니다. 하지만 새롭고 뛰어난 지식과 사상이라도 어느날 갑자기 인류 앞에 등장해 시대를 지배하거나 변화하진 않습니다.


과학은 기존 설명을 의심해 다시 증명하는 학문입니다. 그러나 새로운 지식도 낡은 믿음과 함께 얽혀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죠. 그래서 낡은 것과 새 것의 마찰이 생깁니다. 특히 과학자들 사이에도 대립과 논쟁이 있었던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논쟁의 중심에 교황 같은 권위자가 있는 경우 논쟁은 막대한 영향을 받게 됩니다. '교황 무오류설'을 지켜온 가톨릭이 십자군 전쟁과 유대인 핍박 방조에 대해 시인한 반성은 무려 2000년이 돼서야 가능했습니다.


마찬가지로 근대 과학계에서도 큰 산과 같은 인물의 그릇된 가치관이 지구 나이에 관한 논쟁에서 그릇된 영향을 끼쳤습니다.


과학에서 사용하는 온도의 단위는 절대온도인 캘빈(K)입니다. 섭씨 마이너스 273.15도를 0K로 정의합니다. 이는 영국의 과학자 윌리엄 캘빈 경(1824~1907)이 절대온도 체계를 정립한 공로로 붙여진 이름입니다.


당시 그는 온도뿐 아니라 여러 방면에서 과학 발전에 크게 기여한 세계적인 물리학자이자 전기공학자였습니다. 열 살 때 대학에 입학해 전 과목 수석을 차지한 천재였습니다. 많은 특허를 따고 논문도 발표했죠. 그는 이론 연구에 그치지 않고 많은 측정 도구와 도량형 정립에도 기여합니다. 현재 길이 단위인 미터법에도 그의 손길이 닿아 있죠.


알베르트 아인슈타인(1879~1955)의 상대성 이론은 전자기 방정식을 완성한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1831~1879)이 없었다면 탄생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맥스웰에게 마이클 패러데이(1791~1867)의 이론을 소개한 사람이 바로 캘빈입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첨단 정보통신 기술에도 그의 몫이 있는 셈이죠. 실제로 그는 대서양을 잇는 통신망인 해저케이블 설치에도 관여합니다.


캘빈 경은 영국이 그의 공로를 인정해 내린 귀족 호칭이고 원래 이름은 윌리엄 톰슨입니다. 그는 영국왕립학회장까지 오르며 당시 과학계에서 최고 권위의 인물이 됩니다.


그런데 지구 나이에 관한 논쟁에서 그는 전혀 다른 인물이 됩니다. 당시는 성경에 쓰인 사실을 토대로 지구 나이가 약 6000년이라고 봤습니다. 이를 반론하기가 쉽지 않은 시절이었습니다. 과학계조차 지형을 만든 주요 원인이 노아의 홍수라고 인정했던 때죠.


그러다 새로운 관찰과 이론으로 성경을 기반으로 한 주장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새로 등장한 이론은 지구가 처음에 태양처럼 뜨거웠으나 녹은 상태에서 점차 식으며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는 겁니다. 지구의 냉각 속도와 해수면의 하강을 관찰하고 계산하니 지구의 나이가 늘었죠.


지구 나이는 프랑스의 조르주 루이 르클레르 뷔퐁 백작(1707~1788)에 의해 7만5000년이 됐고 프랑스의 자연사학자 브누아 드 마이예(1656~1738)는 20억 년이라는 파격적인 견해를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과학계에 현재 일어나는 현상으로 과거를 설명한다는 동일과정설이 등장했습니다. 이후 홍수에 의한 지구 격변설은 기반을 잃었죠. 하지만 신은 여전히 과학적 사실에 개입하고 있었습니다.


프랑스의 수학자 피에르 시몽 드 라플라스 후작(1749~1827)은 태양계를 수학적 배열로 보았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도 신의 손은 여전히 존재한다는 믿음이 있었죠. 이런 믿음은 영국왕립협회장인 톰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니까 낡은 믿음이 새로운 의견과 뒤섞여 얽혀 있었죠.


톰슨은 학생 때부터 열역학에 깊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에너지'라는 용어는 톰슨에 의해 처음 사용됐습니다. 그는 열역학이란 학문을 개척했죠. 그의 계산법은 지구가 원래 태양의 일부였고 생성 이후 일정한 속도로 냉각한다는 것이었죠. 그 단서는 광산에서 깊이 내려갈수록 온도가 높아진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원래의 열원이 내부에 남아 있다고 생각한 거죠. 그의 방식으로 계산한 지구 나이는 1억 년이었습니다.

영국의 과학자 윌리엄 톰슨(1824~1907)

영국의 과학자 윌리엄 톰슨(1824~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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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주장은 지질학자들의 추정과 찰스 다윈(1809~1882)이 진화론에서 추정하는 것에 배치됐습니다. 지금의 험난한 지형을 가진 지구 표면이 생성되고 자연선택으로 종들이 변하고 진화하기 위해서는 훨씬 더 긴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죠.


톰슨은 진화론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지금의 창조론자들처럼 성서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자는 입장도 아니었습니다. 자기만의 견해를 주장하고 이에 맞지 않은 의견은 짓밟았던 거죠. 그의 생명기원 주장에도 신은 등장합니다. 세균 붙은 운석이 신에 의해 던져져 우연히 시작됐다는 겁니다.


막강한 권위로 무장한 톰슨의 의견은 논쟁과 과학발전에 막대한 부정적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1846년 1억 년으로부터 시작한 지구 나이는 한 사람의 아집에 발이 묶여 앞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영국왕립학회장이라는 톰슨의 지위는 이 논쟁을 세기 말까지 무려 70여 년이나 끌어갑니다. 이후 프랑스의 물리학자 앙리 베크렐(1852~1908)이 방사능을 발견합니다. 지구 내부에 열을 계속 공급해주는 열원의 존재가 밝혀진 것이죠. 톰슨의 주장은 종말을 고하기 시작합니다.


19세기 중반~20세기 초는 인류의 과학적 성과 대부분이 쏟아진 시기입니다. 당시 많은 과학자가 톰슨의 논쟁 대상이 돼 멸시와 고통을 받았습니다. 수십 년간 많은 학생이 톰슨의 교과서로 왜곡된 지식을 쌓기도 했습니다.


귀와 마음까지 닫고 자기의 경험과 지식만 옳다고 주장하는 권력자의 영향력은 인류 진보에 부정적으로 작용합니다. 우리는 이런 모습을 종교와 과학사가 아니더라도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2020이라는 새해 숫자는 무엇인가 큰 변화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주위의 권력자들은 여전히 자기들의 주장만 내세우고 내로남불로 상대를 흠잡으며 귀조차 열지 않습니다. 사회구조는 뚜렷한 간극이 있는 상하와 경계가 흐릿한 좌우로 나뉘어 사람들의 희망으로부터 멀어져 있습니다. 게다가 세계는 힘의 균형으로 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죠.


지금의 세계는 한 쪽에서 던진 돌이 반대편에 파동을 일으킬 만큼 서로 얽혀 있어 먼 곳의 고통마저 공명하고 있습니다. 이런 파동이 그저 가난하고 힘없는 내 이웃으로부터 비롯됐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권력과 권위를 가진 지도자, 이른바 큰 산이라 일컬어지는 어른들로부터 시작돼 파동으로 전달되죠. 그런 어른들의 생각과 태도, 그리고 행동이 중요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현재를 유사한 과거 사실로 설명가능한 동일과정설처럼 역사는 반복되며 어른들의 과오가 되풀이되는지도 모릅니다. 현재의 불안은 물론 미래의 불확실성으로 그저 평범한 행복을 꿈꾸는 나와 수많은 이웃, 그리고 후대가 불안해 하고 고통과 상처도 받습니다. 잘못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잘못이 되풀이되는 것은 인류에 대한 죄악입니다.


상처받은 우리는 누구에게 사과를 받아야 할까요. 영화 '두 교황'에서 들은 말이 생각납니다. "죄악은 상처이지 얼룩이 아니다. 치료받고 아물어야 하지 용서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사과와 용서로 충분한 게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그 어른들로부터 치유받아야 합니다.


과학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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