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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호의 클래식 라운지] '일진광풍' 틸레만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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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3일 내한공연 빈 필하모닉…베를린 필과 세계 양대 오케스트라
새해 시작 알리는 신년음악회 유명…양성균형 외면 눈총 속 왈츠의 본향
2000년 데뷔 틸레만 균형감·냉철함…분석적 스타일 탓 주변인과 마찰도
'이 시대 최고의 독일 관현악 전문가' 브루크너·R 슈트라우스 연주 예정

한정호 객원기자·에투알클래식&컨설팅 대표

한정호 객원기자·에투알클래식&컨설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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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가 정월 초하루 클래식으로 새해를 시작하는 건 빈 필하모닉의 신년 음악회 덕이다.


성장하고 무지크페라인 황금홀에 들어선 만원 관객의 분위기, 지휘자만 바뀐 채 공연장에서 세계로 울려 퍼지는 왈츠의 선율은 언제나 그대로다. 19세기 빈의 무도회 풍경을 계승하려는 빈 필 구성원들의 노력으로 교육 받은 시민이라면 듣기만 해도 '봄의 소리'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왈츠를 흥얼거릴 수 있다.

흔히 세계 양대 오케스트라를 빈 필, 베를린 필로 규정하지만 애호가 집단에서 벗어나 부지불식간에 세계인의 삶으로 스며든 악단은 빈 필이다. '오스트리아 소프트파워의 정점' 빈 필이 11월 열한 번째 내한공연을 한다.(1~2일 서울 예술의전당·3일 대구 콘서트하우스)


빈 시내로 들어서면 오스트리아의 외교적 풍화를 그대로 견딘 역사적 건축물이 즐비하다. 유엔 교육과학문화기구(UNESCO)는 2001년 빈 시가지 자체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했다.


궁전과 박물관을 지나면 빈 필이 공연하는 장소인 빈 슈타츠오퍼(국립오페라)와 무지크페라인 홀이 있다. 관현악에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하는 베를린 필과 달리 빈 필은 이곳에서 오페라와 관현악도 병행한다. 악단의 인적 구성은 빈 슈타츠오퍼 오케스트라로 재직하는 150여명의 단원에서 3년 의무 기간을 지낸 인원 가운데서 빈 필 정단원(120여명)을 엄선한다.

빈 필 단원은 제1차 세계대전 패배와 나치 독일의 합병, 연합군의 점령을 거쳤지만 전통적으로 과거 합스부르크 제국 영토에 해당하는 오스트리아, 헝가리 출신의 남성 단원을 주축으로 구성한다. 여성에 배타적인 단원 인선을 국제사회가 비판했고 오스트리아가 1995년 중립정책에서 벗어나 유럽연합(EU)에 가입하면서 악단도 제한적이나마 여성들에게 문호를 개방한 상태다.


하지만 양성균형을 외면하는 빈 필이 과연 미래 오스트리아의 문화를 대표할 자격이 있는지 묻는 오스트리아 시민 사회와 정치권의 움직임은 미약하다. 1990년대 중반처럼 미국 여성단체 중심의 압력으로 현상을 타개하기엔 한계가 명확하다.

빈 신년음악회가 열리는 빈 무지크페라인 홀   [사진= IMG, (c) Wiener Philharmoniker]

빈 신년음악회가 열리는 빈 무지크페라인 홀 [사진= IMG, (c) Wiener Philharmoni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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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나치 부역을 반성하는 공식 입장처럼 빈 필 단원 스스로 여성 소외의 과거에 대해 자성하는 인식이 매우 낮다. 심지어 2011년 빈 필 최초의 여성 악장에 오른 알베나 다닐로바 등 10여명의 현직 여성 정단원 역시 오스트리아-합스부르크 출신의 기득권에 안주하면 빈 필에서 '아시아인 배제'와 같은 추가 쟁점을 논하긴 어렵다.


EU 가입 이전에 이미 오스트리아가 가장 번영한 나라로 우뚝 섰다고 판단하는 계층이 선거에서 고립주의를 택할 때 빈 필의 인권 개선은 세계의 보편 기준과 더 멀어진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빈 필의 현상 유지는 클래식 역사에서 자신들의 입지를 최고 자리에 공고히 한 배경이 됐다. 세계에서 왈츠를 빈 필처럼 정교하고 구성지게 연주하는 악단은 없다. 부모와 조상이 겪은 풍상이 왈츠에 그대로 녹아 있다. 세월이 흘러도 왈츠가 번성한 건 빈의 지정학적 특수성과 과거 외교정책 덕이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1769~1821)의 집권과 몰락을 배경으로 19세기 유럽 외교 무대의 중심이 빈이었다. 도시에서는 국제회의가 일상이었다. 무도회는 각국 외교 수뇌가 물밑거래를 하는 또 하나의 외교 전장이었다.


19세기 초반까지 중유럽 일부 지역의 민요에 머물렀던 왈츠는 요한 슈트라우스 2세(1825~1899)가 발표한 신곡을 중심으로 무도회와 정가로 파고 들었다. 오스트리아 외무장관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1773~1859)가 왈츠로 어떤 야욕을 꿈꿨는지는 "회의는 춤춘다. 그러나 진전은 없다"의 경구로 전해진다.


왈츠는 자연이 주는 안온함을 찬미하지만 어느 곡도 건설적인 미래 지향에 대해 논하진 않는다. 내다볼 앞날이 없어도 유산을 제대로 지키는 과업의 무게는 온전히 빈 필 단원들에게 있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1908~1989) 사후에 단원 투표로 음악감독을 뽑은 베를린 필과 달리 빈 필은 1933년 이후 지금까지 특정 지휘자에게 음악감독을 맡기지 않는다. 대신 도시와 빈 필에 남은 전통을 존중하는 지휘자들과 지속적으로 협업하면서 클래식 세계에서 불변의 고전이 자기들에게 있음을 증명하고자 노력했다. 구스타프 말러, 빌헬름 푸르트뱅글러, 클레멘스 크라우스 등 과거 수장들도 단원들의 보수적 성향을 다룬 성과에 따라 리더십을 평가 받았다.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사진= IMG, (c)Terry Linke]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사진= IMG, (c)Terry Lin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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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필의 과거 명지휘자는 펠릭스 바인가르트너, 에리히 클라이버, 카를 뵘을 위시한 오스트리아 출신과 아르투르 토스카니니, 레너드 번스타인(1918~1990), 클라우디오 아바도처럼 독자적이며 강렬한 개성이 단원들과 호응한 지휘자들로 나뉜다.


그러나 카라얀, 번스타인이 세상을 떠나고 공산권이 무너지면서 1990년대부터 빈 필도 '거장 시대' 이후의 지휘자들과 공연해야 했다. 바깥 세상은 변하지만 빈 필이 지켜야 할 가치를 고수하는 지휘자가 선별돼야 했다.


베네수엘라의 무상 음악교육 시스템인 '엘 시스테마'가 낳은 구스타보 두다멜(현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 음악감독)은 흡사 번스타인처럼 들끓는 정열을 무기로 악단에 들어왔으나 결과물이 마땅치 않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프란츠 뵐저 뫼스트(현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 음악감독)는 빈 필 신년 음악회 데뷔로 명사가 됐지만 과거 자국 출신 지휘자급의 존재감은 없다.


21세기 내내 빈 필이 가장 신뢰하는 지휘자는 다음 달 1~2일 서울 공연을 이끄는 크리스티안 틸레만이다. 2000년 틸레만이 빈 필에 데뷔한 이래 2010년대 이들이 함께 한 여정은 사실상 틸레만이 음악감독과 다름없는 것이었다. 2003년 틸레만이 부상한 볼프강 자발리시 대신 빈 필 일본 투어를 성공적으로 마감한 게 전환점이었다.


과거 뵘, 자발리시와 나누던 수준의 밀월이 틸레만과 함께 이뤄지고 있다. 악단과 지휘자는 음악언어를 매개로 교감하는 사이다. '독일 음악의 명장' 귄터 반트는 자기 지시를 따르지 않는 단원들에게 역정냈다가 악장 빌리 보스코프스키로부터 "우리는 그런 요청을 따르지 않는다"는 모욕까지 들었다. 하지만 틸레만과 빈 필 사이에 그런 일은 없다. 심지어 보편적 인권을 바라보는 시각 역시 서로 닮았다.


서베를린 출신의 예순 살 틸레만은 언제나 청년의 인상으로 냉철함을 유지했다. 어떤 상태에서도 균형감을 잃지 않는 자세가 빈 필이 희망하는 독일-오스트리아 관현악의 중점 가치였다. 브람스-바그너-브루크너-리하르트 슈트라우스에 이르기까지 독일-오스트리아계 저명 작곡가들이 극찬했던 악단의 자존감을 재확인시키는 존재가 틸레만이다.

빈 필 신년음악회에서의 크리스티안 틸레만   [사진= IMG, (c) Matthias Creutzinger]

빈 필 신년음악회에서의 크리스티안 틸레만 [사진= IMG, (c) Matthias Creutzin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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틸레만은 인정에 연연하기보다 감정을 소모하지 않고 차분하고 치밀하면서 분석적으로 계산하는 과정과 결과야말로 독일계 음악의 본질이라고 봤다. 카라얀을 보고 자란 학습과 어려서 독일권 중소도시에서 오페라 감독을 경험하면서 익힌 그만의 원칙이다.


바그너 악극을 전문으로 하는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이 끝나면 "가수의 초월적인 기교가 빛났다"는 평가보다 "틸레만의 영도 아래 균형 있는 음악이 나왔다"는 평가가 주를 이룬다. 틸레만은 체구가 크지만 성격이 예민하다. 독일인이라도 자음을 놓치지 않고 자기 방식대로 발음하라고 집요하게 요구하는 리허설이 경력 초기부터 유명했다.


그러나 연습과정부터 실연이 끝나기까지 공연 제작에 참여한 구성원들에게 만기친람(萬機親覽)으로 자기가 원하는 모든 것에 맞추라는 지시는 결국 주변인들을 떠나게 만든다. 틸레만은 그가 감독한 여러 음악 조직에서 일로 만나 일로 관계를 끝냈으나 결말은 모두 불행했다. 오히려 감독직을 두지 않는 빈 필 제도가 악단과 틸레만 사이의 마찰을 방지하는 완충재다.


틸레만이 내한 연주할 곡들은 브루크너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다. 과거 아다지오 부분에서 빈 필 단원들은 틸레만이 손조차 움직이지 않아도 곧 이어질 격정을 준비하는 예비 동작임을 알고 있었다. 차분한 가운데 폭풍우가 필요할 때 일진광풍을 만들어내는 다이내믹이야말로 틸레만을 '이 시대 최고의 독일 관현악 전문가'로 규정하는 핵심 역량이다.


2020년대에도 브루크너 교향곡 전곡 연주회로 틸레만과 함께 하기로 한 빈 필 입장에선 틸레만의 대내외적 캐릭터와 함께 하는 위험도 고스란히 부담해야 한다.


객원기자·에투알클래식&컨설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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